▶ 3루트 나눈 36개 챕터마다 주인공·작곡가·대본가 달라
▶ 차·도시·음악에 새로운 경험 “모 바일 오페라” 찬사 쏟아져
루차(오른쪽, Alisa Guardiola 분)와 천사(Quayla Bramble 분)가 노래하고 있다. 사 진 < LA Times>
루차(Rebekah Barton 분)이 제이미슨(Nicholas LaGesse 분)을 찾아 하데스로 내려가고 있다. 사 <진 LA Times>
‘합스카치’(Hopscotch: A Mobile Opera for 24Cars)라는 제목의‘ 모바일 오페라’ 때문에 요즘 LA음악계가 떠들썩하다.
실험 공연단체 ‘인더스트리’(The Industry)가 제작한‘ 합스카치’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내용과 음악, 형식과 진행으로 이루어지는 ‘움직이는 오페라’공연이다. 관객이 극장에 앉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리무진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건물과 장소에서, 혹은 길거리, 터널, 옥상, 공원묘지, LA 강변 등지에서 벌어지는 약 10분 길이의짧은 장면들을 연달아 총 90분간 감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차를 갈아탈 때마다 어디로 가는지도모르고, 이동 순서 또한 ‘합스카치’(사방치기)란 단어 뜻처럼 스토리 순서대로가 아니라 이 챕터, 저챕터 뛰어넘거나 뒤섞인 채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방향감각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설명과 이해가 쉽지 않은, 시공과 인식을 넘나드는 공연이며초월적이고 관념적인 동시에 또한 체험적이어서누구나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10월31일 핼로윈 데이에 시작돼 3주 동안 토요일과 일요일 낮에만 하루 3회씩 총 18회 공연이 예정됐던 이 오페라는 일찌감치 꼭 봐야 될 공연으로 소문이 파다해서 티켓(115~145달러)이 오래 전에 매진됐고, 사람들의 야단법석에 주최 측은 공연 스케줄을 2회 늘려 이번 주말(21일과 22일)까지로 연장했지만 그 티켓도 판매시작 10분만에600장이 동나 버렸다.
‘ 합스카치’는 개막되자마자 LA타임스, 뉴욕타임스,월스트릿 저널, 뉴요커 등 주요 언론들은 이 작품을 만든 예술감독 유발 샤론(Yuval Sharon)의 인터뷰는 물론 준비과정부터 리허설, 공연실황을 모두 커버하며 집중취재, 이 특이한 오페라에 대해경이와 찬사로 가득한 특집기사를 냈다“. 오페라의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호들갑스런 팡파르를 보내는 수많은 언론의 조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앞으로 한동안 음악계는 이 작은 인디 오페라가남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아르헨티나 작가 훌리오 코르타자르의 1963년 동명소설을 유발 샤론 감독이 재구성, 창조한 ‘합스카치’는 루차(Lucha)라는 여성과 모터사이클을 타는 JPL 과학자 제이미슨(Jameson),이스트LA 인형극단의 올랜도(Orlando), 세 사람이 주인공이다. 루차는 제이미슨과 사랑에 빠져결혼하지만 그는 곧 사라져버리고, 올랜도는 아내가 죽자 루차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가받아들이지 않자 파리로 떠나버린다. 제이미슨을 찾아 헤매던 루차, 결국 다시 돌아온 올랜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어느 순간 제이미슨의 환영으로부터 벗어난다.
이 기본 스토리가 36개의 챕터로 나뉘어 공연되는데 관객은 36개 챕터를 모두 볼 수가 없다. 오페라 공연 루트가 레드, 옐로, 그린의 3개루트로 나뉘어 있고 관객은 이 중 하나를 선택해서 따라가게 되므로 전체의 3분의 1밖에는관람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3종류의 티켓을모두 사서 다 돌아본 열혈 팬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옐로는 LA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돌고, 레드는 그 바깥쪽을 돌며, 그린은 이스트LA 보일하이츠 주변을 돌아오도록 모두 다르게 짜여진루트로서, 각 루트는 서로 다른 8개 챕터를 공연한다. 36개 챕터 중 24개를 뺀 나머지 챕터들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누구나 웹사이트(hopscotchopera.com)에서 볼 수 있으며, 피날레는 모두 ‘센트럴 허브’ 한 곳에서 모이게 된다.
다운타운 아츠 디스트릭에 지어진 센트럴 허브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24개 모니터를 통해모든 공연을 생중계하는데 여기는 누구나 가서무료로 구경할 수 있다.
‘합스카치’ 제작에 참여한 사람은 6명의 작곡가와 6명의 대본가, 126명의 가수, 연주자, 댄서, 배우들, 그리고 수십명의 리무진 운전자와챕터 안내자들, 테크니션과 스태프 등 셀 수 없이 많다. 3명의 주인공은 24개 챕터의 거의 모든 곳에 있어야 하므로 루차 역을 맡은 가수만 19명, 모두 다르게 생겼지만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모두 루차로 표현된다. 제이미슨도, 올랜도도 마찬가지여서 차림새만 같을 뿐장면마다 그들의 모습은 다르다.
나는 이 제작팀을 후원해온 한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티켓을 구해 지난 14일 오후 2시45분 공연의 옐로 루트에 합류할 수 있었다. 관람은 4명이 한 조가 되어 리무진을 타고 함께움직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총 24개조(96명)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출발, 서로 다른 루트로 각기 다른 챕터를 방문하고 또 그다음 챕터로 옮겨가는 방식이니, 24개 조의 동선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시간적으로 겹치거나펑크 나지 않도록 리무진의 교통흐름까지 다계산해서 오페라를 진행하는 치밀함이 정말 놀라웠다.
우리 조는 다운타운 3가와 브로드웨이 코너의 ‘밀리언 달러 디어터’에서 챕터 31 공연을방문하는 것으로 ‘합스카치’ 감상을 시작했다.
루차가 사라진 제이미슨을 그리워하며 그와 함께 갔던 오페라에서 오르페우스가 노래하는장면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다음은 챕터 20, 리무진 안에서 제이미슨이 관객 4명에게 헤드밴드를 씌우고 의식을 흐름을 실험한다. 이어 챕터 25, 브래드베리 빌딩(Brandbury Building)에서는 루차가 제이미슨이 다른 여자를 만났다가납치당한 것이 아닐까 환상 속에 괴로워하는장면이 공연되고, 챕터 28, 리무진 속에서 다시만난 루차와 올랜도가 옛 이야기를 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관람한다…이런 식으로 레드 루트와 그린 루트에서도다른 공연자들이 다른 음악과 스토리를 들려주는 또 다른 챕터들이 동시에 공연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스토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갔어도 별 도움이 되지않는 것이 순서가 뒤죽박죽인데다 각 챕터마다작곡가와 대본가, 공연자들이 모두 달라서 연관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작곡가들은 모두LA에서 활동하는 현대 음악가들로서 각자 음악 스타일이 크게 다른데다 대부분 초현실적이거나 무의식의 흐름을 다루는 창작을 선보이고있어 전체를 순서대로 본다 한들 헷갈리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합스카치’는 자동차와 도시와 음악에 관한오페라적 헌사라고 할 수 있다. 다들 매일 운전대를 잡고 살아가는 LA에서, 자동차라는 또 다른 사적인 공간을 공연장으로 만들고 바로 코앞에서 가수가 나를 위해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다. 또 차를 타고 계속 옮겨 다니며 우리가사는 도시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경험하게 되는데, 지나가는 행인과 차량과 건물 등 도시의일상 풍경과 흐름을 오페라의 무대배경으로 삼아버린, 아니 도시 속에 오페라를 집어넣어버린대단히 창의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뉴요커’는 이 공연을 로드 트립, 건축 투어,현대 음악 페스티벌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이 도시에 살면서 생전 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공간들을 방문하는 것이 큰 선물이었다. 특별히 처음 들어가 본 밀리언 달러 디어터와 브래드베리 빌딩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LA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100년 역사를 간직한 고색창연한 밀리언 달러 극장은 내부 구조와 인테리어를 하나도 손대지 않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환상마저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합스카치’는 300년 동안 같은 형식으로 공연되어 온 오페라의 벽을 허물고 해방시킨 작품이다. 오페라하우스라는 고전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으로부터 오페라를 끄집어내 대중의 열린 공간으로 옮겨놓은 이정표적 작품이다.
처음이라 어리둥절했는데 다시 볼 기회가 있다면 기존의 오페라 감상 태도를 다 벗어버리고 챕터마다 오관을 열어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총체적인 경험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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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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