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거엔 반전이 있기 마련이지만 2016년 공화당 대선은 특히 더 그렇다. 두 명의 후보가 누구도 예상 못한 방향으로 경선의 흐름을 바꾸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젭 부시다. 지난 몇 달 트럼프 돌풍이 선거판을 요란하게 흔들어댔다면, 설마설마 하는 사이 당 기득권층을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자신들의 ‘기름 부음 받은’ 선두주자 부시의 추락이다.
부시에게 지난 한 주는 최악의 시간이었다. 부진을 벗어날 모멘텀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던 3차 후보토론은 오히려 추락을 가속화시키는 참패로 끝났고 온라인-오프라인 미디어들은 일제히 ‘부음 예고’를 다투어 보도했다.
지지도 하락과 모금실적 저조에 선거본부 인력까지 줄여야 했던 부시에게 이번 토론은 기회였다. 그러나 (공격에 능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부시가 (별러서) 마르코 루비오에게 가한 일격의 결과는 참담했다. 현직 상원의원 루비오가 유세하느라 의회표결에 불참한 것을 비난한 나름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루비오는 “부당하다”며 곧장 반격한 후 의연하게 덧붙였다. “날 공격하는 게 유리하다고 누군가 조언한 것 같은데…난 당신과 싸우려고 나선 게 아니다”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에 묻혀버려 반박조차 못한 채 어느새 자신보다 커버린 ‘정치적 제자’에게 압도당한 부시의 머쓱한 모습만 이날의 ‘가장 기억나는 장면’으로 남고 말았다.
단순한 토론 실패로 끝난 게 아니었다. 루비오에게 넉다운 당한 패자의 이미지에 겹쳐진 것은 백전노장 힐러리 클린턴과의 본선 토론에서 더욱 쩔쩔매는 부시의 내일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부시의 최고 자산 중 하나였던 ‘본선 경쟁력’의 거품이 터지면서, 기득권층에 ‘루비오’라는 대안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부시의 조명은 꺼졌다” “지금은 젭!의 시대가 아니다” “아마도 부시는 끝난듯하다” “부시의 침몰, 루비오의 부상”
- 지난 주말 인터넷을 달군 선거분석들이 고하는 부시의 종말은 지난 10개월간의 지지도 그래프를 보면 실감이 난다.
지난 연말 출마를 시사하면서 지지율 23%의 선두주자로 출발했던 그는 6월 중순까지도 20% 안팎의 안정적 1위를 유지했었다. 트럼프 돌풍에 휩싸인 8~9월에도 13~15%로 ‘아웃사이더들’을 젖혀놓은 ‘지명권’ 후보 중에선 선두를 지켜왔다. 그러나 10월 들어 루비오에게 조금씩 밀리던 지지율은 하순에 접어들면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4일 현재 최근 5개 전국조사 평균 5.8%로 트럼프와 벤 카슨은 물론, 테드 크루즈에게도 밀린 5위에 처져 있다. 아웃사이더 2명에 이어 3위인 루비오 지지율 11%의 절반에 불과하다. 어제 나온 퀴니피액 조사에선 4%, 바닥을 쳤다.
당연히 정치예측마켓에서도 밀려났다. 프리딕트와이즈가 집계한 11월4일 현재 공화경선 승률은 루비오가 44%의 1위로 급부상했으며 6월만 해도 33%로 1위였던 부시는 9%의 공동5위로 낙하했다.
토론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만 부시 추락의 원인은 그전부터 쌓여왔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주류미디어의 분석은 가혹할 정도다. 월스트릿저널은 “부시의 부진은 트럼프 때문이 아니다. 트럼프는 부시의 문제를 노출시켰을 뿐이다. 부시는 함량미달이다”라고 단언했고 USA투데이는 부시 캠페인은 “시대와 유권자의 변화를 놓치고 있다”면서 지금은 부시의 타이밍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상당수 미디어가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질문이 있다 : “젭은 대통령 출마를 진심으로 원하는가?
”열흘전의 유세연설에서 부시의 절박하지 않은 속 마음이 드러난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한다. “이 선거가 이룰 것 없이 싸움만 하는 것이라면 난 하고 싶지 않다…날 악당으로 취급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을 악당으로 취급하고 싶다고 느끼며 비참해지는 것 대신 내겐 할 수 있는 멋진 일들이 많다…그런 걸 원하다면 트럼프를 뽑아라”
진흙탕에 발 담기 싫은 젠틀맨 부시의 좌절은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까마귀 싸우는 골”에 가지 않겠다는 백로의 몸 사리기가 사생결단의 요즘 선거판에서 통할 리가 없다. 분노한 유권자들은 자신들을 위해 싸워줄 투사를 원하는데 투사의 기질도, 투쟁의 의지도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이 부시 종말을 단언하는 선거 전략가들의 지적이다.
부시가 당장 퇴장할 것으로 예상하는 건 아니다. 대부분 후보하차의 원인은 재정난이다. 선두권이었던 스콧 워커도 그랬다. 부시에겐 자산이 충분하다. 돈도 많고 수퍼팩도 든든하고 당 지도부의 약속도 아직 유효하며 성공적인 2선 플로리다 주지사의 경력도 그대로다.
“난 아직 건재하다”고 거듭 강조해야 했던 굴욕의 지난 주말을 보낸 부시 자신도 이번 주부터 새로운 각오로 순회유세에 돌입했다. 준비만 잘 한다면 다음주 4차 토론에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기의 오르막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 지는 그 자신도 알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다. 부시가 역량을 증명하고 표밭과의 공감대를 넓힐 때까지 기다려줄 여유가 기득권층에겐 별로 없다. 승리를 허용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들이 선두권으로 더 굳혀지기 전에 서둘러 주류의 후보를 안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층의 눈길은 이미 루비오를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6년 대선의 첫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는 이제 88일밖에 안 남았는데 공화필드는 여전히 한치 앞을 보기 힘든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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