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의 저력이 빛을 발한 밤이었다. 2008년 캠페인에서 토론의 달인 버락 오바마와 25번의 대선후보 토론을 통해 갈고 닦았던 힐러리의 풍부한 경험은 13일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 첫 토론의 무대를 주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자신감에 찬 당당한 자세로 ‘대통령답게’ 보였고, 논쟁 이슈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전문지식을 과시했으며, 평소와 달리 토론을 즐기는 듯한 편안한 태도로 ‘인간적인’ 면모까지 친근하게 내비쳤다. 업그레이드된 힐러리였다.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했다 - 압도적으로”
토론 후 5시간 만에 민주·공화 양당 대선진영의 작전참모에서 풀뿌리 운동가까지 각 계층 인사이더들의 평가를 종합분석한 폴리티코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이번 토론의 관전포인트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힐러리는 지지도 추락을 막고 대세론을 되살리는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둘째, 버니 샌더스는 대학생과 고학력 백인 리버럴에 편중된 지지층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킬 수 있을까. 셋째, 토론에서 힐러리가 부진하고 샌더스가 약진하면서 조 바이든의 출마가 ‘필연적’이 될 수 있을까. 넷째, 지지율 1%에도 못 미치는 나머지 세 후보 -마틴 오맬리, 짐 웹, 링컨 채피는 ‘민주당의 칼리 피오리나’가 될 행운을 얻을 수 있을까.
이들 관점에 근거한 승패는 한 눈에 드러난다. 승자는 힐러리, 크게 잃은 것도 크게 얻은 것도 없는 샌더스는 중간, 패자는 바이든과 하위권 세 후보다.
힐러리의 선전으로 바이든의 (이미 너무 늦은데다 준비도 미흡한) 출마선언 의미는 약화되었고, 오맬리를 비롯한 세 후보는 ‘힐러리 대 샌더스 격전’의 주변을 맴돌다 좌중을 사로잡을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찾지 못한 채 피오리나가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계속되는 이메일 스캔들과 예상 못한 샌더스 돌풍에 비틀대며 지지율과 신뢰도의 동반 추락으로 당내 지지마저 위협받는 시련의 여름을 지나온 힐러리에겐 이번 토론의 승리가 절박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준비도 빈틈없어 보였다.
첫 질문부터 만만치 않았다. 동성결혼에서 무역협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슈의 입장표명에서 말 바꾸기를 거듭한 사례를 열거하며 사회자가 물었다. "당선되기 위해선 무슨 말이든 할 겁니까?”
얼굴이 굳어지며 방어태세를 취하는 대신 힐러리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난 평생 일관된 가치관과 원칙을 위해 싸워왔다”고 전제한 그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예로 들며 자신이 지지했었을 때와 협정의 내용이 달라졌다면서 중산층의 임금인상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반대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설전 끝에 힐러리는 “당신은 중도냐, 진보냐?”고 정치적 정체성을 추궁하는 사회자에게 “난 진보다.
그러나 일을 성사시키기 원하는 진보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진보적 정치철학을 가졌으나 실용적 리더임을 강조한 것이다.
요즘의 표밭은 아웃사이더를 원한다는 지적엔 “첫 여성대통령 선출보다 더한 아웃사이더는 생각하기 힘들다”고 대답했고 10여년 전의 이라크전쟁 지지를 물고 늘어지는 오맬리와 채피의 공격도 의연하게 받아 넘겼다.
이날 공격의 주 타겟은 오히려 샌더스였다. 농촌지역 버몬트 주 연방 상원의원이어서 진보의 기수답지 않게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던 총기규제와 부패한 카지노 자본주의를 바로잡는 ‘정치 혁명’으로 덴마크를 모델삼자는 민주적 사회주의 논쟁에서 샌더스는 힐러리의 날카로운 공격에 몰려 수세를 면치 못했다.
물론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역설하는 그의 거친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고 진지했으며 박수갈채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그를 진보표밭의 아이돌로 부상시키며 힐러리의 지지도를 잠식한 바로 그 모습이 세련되고 침착한 힐러리와 한 자리에 나란히 섰을 때 힐러리를 ‘대통령답게’ 돋보이게 했다고 애틀랜틱지는 평가했다.
이날 최고의 순간은 샌더스의 힐러리 구출이었다. 이메일논란 질문이 이어지며 실수를 인정한 힐러리가 고군분투하자 샌더스가 나선 것이다. “미국민들은 그놈의 이메일 얘기를 지겨워한다” - 이 한마디는 샌더스에게 기립박수의 열렬한 환호를 안겨주었으나 실질적 성과는 힐러리 차지였다. 최소한 경선 중엔 이메일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루할 것이라던 민주당 토론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민주당 TV토론으로는 최고기록인 1,500만명이 시청했다. 원색적인 인신공격이 난무한 공화당 서커스의 막장 재미는 없었지만 진지한 이슈를 둘러싼 격렬한 토론의 관전 재미도 쏠쏠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토론의 최고 승자는 ‘민주당’이라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류언론들은 지적한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공동 목표에 합의한 후 그 실현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논쟁하며 이념싸움보다는 “통치에 포커스를 둔 정당”이라는 민주당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토론이었기 때문이다.
힐러리의 앞날은 아직 장담하기 힘들다. 정치예측시장의 힐러리 경선승리 가능성은 압도적인 72%로 더 뛰어 올랐지만 이메일 논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신뢰도’는 하루아침에 회복될 수 없는 문제다. 그래도 당분간은 재도약의 첫발을 내딛은 ‘컴백 키드’ 힐러리의 본격투쟁이 민주당 대선필드에 활기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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