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전에 사 두었던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이제야 읽었다. 유행을 따라가지는 않지만 무시하지도 않는다는 신조로 일 년치 읽을 책을 줄 세워 놓는 독서습관 때문이다. 보석이라면 유행이 지난 일 년 후에도 빛이 나게 마련이다.
첫 소감은 이렇게 재미있는 (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책을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가 든 것이다. 비행기를 탈 때는 당시 가장 유행하는 흥미위주의 소설을 읽곤 한다. 작년 가을 서울 출장길에 마이클 루이스의 신간 소설을 읽었던 것이 후회된다. 그때 비행기 안에서 이 책을 읽었어야 했다.
두 번째 소감은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에 고마운 생각이 든 것이다. 700페이지라는 분량도 적지 않지만, 경제학 서적은 대중이 좋아할 내용이 아니다.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지 않는 경제학 서적이 전 세계적으로 200만권이나 팔린 것은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200만명 중 완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완독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다. 피케티는 체계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21세기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담담하게 제시한다. 요즘의 사회경제 또는 정치경제관련 책들은 극단적 주장을 서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주입시키려 논리를 강요하기 일쑤다. 피케티의 책에는 강요가 없어서 읽기가 편하다.
피케티는 200여년의 통계로 과거의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객관적 시각을 잃지 않는다. 피케티가 직관하는 사회적 현상은 성장의 정체이다. 21세기에 서방 선진국은 1% 내외의 낮은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현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한국을 비롯한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한때 10% 가까운 경제성장을 기록했지만, 이는 선진국을 모방하고 추종하는 단계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임에 주목한다. 끝없는 고성장을 계속할 것이라 생각되었던 중국이 정체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저성장 경제구조 속에서도 자본은 기존의 4~6% 소득율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성장률을 초과하는 자본수익은 자본에 재투자되고, 기존 자본가에게 편중된 부를 심화시킨다. 고임금소득자가 새로이 불로소득 집단에 합류하였다. 기술개발의 결과를 독점함으로써 경제 권력을 형성하고, 기술독점의 대가를 임금이라는 명목으로 수확하고 있다.
1,000만 달러가 넘는 경영자 고임금은 이제 한국에서조차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상위 1%의 임금 소득자가 1970년대에는 미국전체 임금소득의 9%를 벌었는데, 2000년대에는 22%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자본가로 부상해서 부를 대물림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 완화정책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피케티는 세금이 부의 불평등을 상당부분 완화시켰던 역사에 주목한다. 20세기 전반기동안 서방국가들은 전쟁자금 조달을 위해 부유세를 물렸고, 결과적으로 지난 200년 동안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적은 때였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소득세 누진율을 강화하고, 세금을 저소득층의 동기유발에 이용한다면 21세기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은 축복받은 나라다. 피케티와 미국의 인연은 1990년대 MIT에서 3년간 경제학을 가르쳤던 것이 전부다. 그런 외국인이 유럽의 통계를 분석해서 미국에 진정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유럽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적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이민정책으로 저출산 문제를 보완하고, 유럽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불평등 해소에 노력하라고 제안하는 애정을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책 내용에 한국에 대한 예시는 전혀 나오지도 않는다. 선진국의 실패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처하려는 국민적 관심이 자랑스럽다. 헛된 성장률로 국민을 현혹시키고, 청년실업의 근본적 원인을 고민하지 않는 정부가 걱정스럽다. 해결책이 꼭 피케티의 방법일 필요는 없다. 성장위주의 낡은 경제정책을 탈피해서 국민 모두가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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