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40여년 전 새마을 운동과 쌍벽을 이룬 거국적 캠페인이 있었다. 산아제한, 좋게 말해서 가족계획이다. ‘3-3-35’(세살 터울로 셋만 35세 전에 낳자)라는 슬로건이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됐다가 ‘둘도 많다, 하나만 알뜰살뜰 기르자’로 바뀌었다. 캠페인 목표가 초과 달성된 지금 슬로건은 ‘자녀에게 동생을 낳아주자’로 정반대가 됐다.
당시 새내기 기자였던 내가 담당한 정부 부서가 보건사회부(현재 보건복지부)였다. 그 산하에 대한 적십자사와 대한 가족계획협회가 있었다. 남북 적십자회담이 진행된 때여서(덕분에 나도 평양구경을 했다) 적십자사엔 관심이 많았지만 가족계획협회는 좀 따분했다. 보도 자료가 기껏 산아제한의 필요성이나 피임요령 따위여서 신혼 초였던 나에겐 시큰둥했다.
대한 가족계획협회(PPFK: 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of Korea)는 새마을 운동에 앞서 1961년 창립됐다. 롤 모델인 미국 가족계획협회(PPFA)에서 영어명칭을 땄다. 출산율이 격감하면서 1999년 ‘대한 가족보건복지협회’ 그리고 2005년엔 다시 ‘인구보건복지협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어명칭은 여전히 ‘PP’다 ‘Parenthood’를 ‘Population’으로 바꿨을 뿐이다.
목표를 달성한 한국의 PP가 유명무실해진 것과 달리 형님뻘인 미국 PP는 요즘 엄청 바쁘다. 가족계획사업이 잘 돼나간다는 뜻이 아니다. 사면초가 상황에서 연일 얻어맞고 있다. PP의 한 직원이 생체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위장한 낙태 반대단체 요원에게 중절 시술된 태아의 신체부위를 ‘팔아먹으려고’ 흥정하는 장면이 찍힌 몰카 비디오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공화당 대선 후보인 칼리 피오리나는 최근 후보자 2차 TV토론에서 “(낙태 권리를 지지하는) 오바마 대통령도, 힐러리 클린턴(민주당 후보)도 이 비디오를 봐야 한다. 테이블에 아직 심장이 뛰는 태아가 놓여 있다. 이 태아의 조직을 떼어 파는 게 미국의 양심이냐”며 앙칼지게 따졌다. 덕분에 그녀의 지지율은 선두 도널드 트럼프를 바짝 추격할 만큼 올라갔다.
하지만 문제의 비디오에는 태아 장면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PP는 “아무리 좋게 봐도 피오리나 후보는 거짓말쟁이다. 대통령 후보답지 않게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지 말고 몰카 비디오를 더 이상 캠페인에 이용하지 말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IT 공룡기업 HP(휼렛-패커드)의 CEO 출신인 피오리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PP를 계속 물고 늘어지고 있다.
공화당은 경선 과정인데도 피오리나를 지원 사격하고 나섰다. 연방상원의 다수당인 공화당은 10월1일로 닥친 정부기관 폐쇄 위기를 피하기 위한 단기 추경 예산안에 작심하고 PP 지원분을 삭제했다. 하지만 이 예산안은 이틀 전 표결에서 52-47로 부결됐다. 공화의원 8명이 반란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PP는 연간 약 5억달러를 연방정부로부터 지원 받는다.
미국 PP는 1921년 비영리단체인 미국 산아제한연맹(ABCL)으로 출발해 1942년 국제가족계획협회(IPPF) 산하의 PPFA로 개명했다. 전국에 85개지부와 820개 시술소를 운영하며 연간 30여만 건의 낙태를 시술한다. 이 중 26%가 19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때문에 PP는 낙태 찬반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그 중심에 설 수 밖에 없었다.
PP가 피임상담, 피임약 배포, 성병 치료, 여성암 진단 등 좋은 사업을 많이 하지만 낙태시술에 가려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시술소 앞은 낙태반대 시위장이 되기 일쑤다. 사우스다코타와 위스콘신에선 시술소에 폭탄이 날아들어 불탔고, 미네소타에선 시술소 건물로 SUV가 돌진했다. 오리건에선 3년 전 시술소 앞에서 찬반 시위자 사이에 칼부림이 빚어졌다.
한국 PP의 전성기엔 예비군 동원을 면제해주며 정관수술을 장려했다. ‘씨 없는 수박’이 양산됐었다. 출산 장려금에도 아기를 안 낳는 요즘 세태와 판이하다.
미국 PP도 사면초가를 면할 것 같다. 낙태는(조건부지만) 거의 반세기 전인 1969년 합법화됐다. 금기였던 동성결혼도 합법화 됐고 마리화나와 존엄사도 그런 추세다. 세상 돌아가는게 어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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