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번 타자가 홈런을 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 9번 타자가 홈런을 날리면 그 쾌감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제니퍼 김의 작품.
박나리
【새벽 여명 / 박나리】
넘버 원 하이웨이 옆에서 남편과 함께 작은 모텔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초저녁잠이 많은 남편을 대신하여 예약손님을 기다리며 오피스를 지키는 일은 내 차지였다. 자연스럽게 인터넷에 접속하는 시간이 길었다. 우연히 접속한 인터넷 카페에서 문학 작품들을 읽게 되었다. 시는 사색하길 좋아하는 나를 상상의 나라로 초대하였다. 가끔 시를 쓰곤 그 다음 날 일어나 보면 그건 시가 아니었다. 시 창작에 대하여 배운 적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로 실망하지도 않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를 이해하려고 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때로는 당선 소감이 훨씬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시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여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수필은 시와는 또 다른 메시지를 주었다. 마음에 드는 수필은 무조건 필사부터 하였다. 사람 살아가는 일이 모두 제각각이라고 하지만, 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각도가 나와 전혀 다른 것에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었다.
그저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로 살면서 잘 자라 준 세 아이의 엄마라는 이름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 행복 뒤에는 내 수고와 희생이 숨어있지만, 당연히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내 이름은 지워지고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은 아이들을 통하여 이루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리만족은 결국 내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떠난 빈 둥지를 지키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긴 터널을 지나온 느낌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득한 시절도 있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운명이란 게 있다. 그 운명을 피하지 않고 나는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없고 오직 가족만을 위하여 살아온 세월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럴 시간이 없을 만큼 현실에 부대끼느라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았다. 남편의 사업 뒷바라지와 시부모님의 병시중으로 오랫동안 힘들었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잘한다 하여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다. 한국말로 대화를 할 이웃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근처에 한국사람이 살지 않는다. 마음이 답답하고 외로운 날, 일기처럼 무작정 써내려간 글들이 어느새 노트로 몇 권이 되었다.
6년 전, 남편이 캘거리의 아리랑 마켓에서 한인신문을 가져왔다. 신문사에서 문학공모전에 대한 기사가 내 눈길을 끌었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고 호떡이나 자장면을 얻어먹기도 하였기에 한번 응모나 해보자 싶었다.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럼 그렇지 당신이 무슨 시를 쓴다고…. 남편의 질책이 얄미웠지만 할 수 없었다. 다음 해 또 응모했다. 응모한 사실도 잊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게 수상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바라보면서 신기하고 흥분되었다. 비록 가작이라도 너무 행복했다. 혼자서 시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알고 싶었다.
인터넷 카페에 내가 좋아하는 꽃 이야기와 여행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문학 카페에 글을 올리면 반응이 좋았다. 모텔이 바쁜 여름철에는 글을 뜸하게 올리면 카페의 친구들이 무슨 일이 있느냐며 궁금해했다. 안부를 물어왔고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물론 말이 아닌 글이지만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글을 썼던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밤을 새우는 날도 허다했다. 내가 쓴 글을 보고 울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하였다. 응모한 작품 중에서 한국일보사와 재외동포 재단에서 주는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글쓰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때쯤 알게 되었다. ‘방송통신대학’처럼 요즘은 ‘온라인 대학’이 있어 외국에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직접 한국으로 전화해서 입학 요강에 대해 질문도 하였다. 수소문 끝에 온라인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람을 소개받아서 수업을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기도 하였다. 정보를 알아갈수록 자신이 없었다. 나이가 육십인데 과연 공부할 수 있을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할 수 있을까? 될까? 말까? 망설였다. 남편은 그냥 취미로 글을 쓰면 되지 뭣 하러 사서 고생을 하느냐며 말렸다.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열정은 있으나 용기가 부족했다. 시작하다 끝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먼저였다. 미련을 버리고 못한 채 12월만 되면 사이버대학의 문예창작학과를 기웃거리며 40년 전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게 되었다.
1974년의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어머니가 한사코 말리는데도 나는 면도칼을 가슴에 품고 집을 나왔다.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라디오에서 대학 예비고사 합격의 당락을 발표해주고 있었다.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처럼 굴었다. 부산 범일동에 있는 교육청 입구에 대자보가 붙었다. 많은 사람 속에서 까치발을 하고 내 이름과 수험번호를 면도칼로 오려서 준비해간 봉투에 담아왔다. 그것은 신성한 의식 같은 거였다. 지금은 수능점수로 원하는 대학교에 시험을 볼 수가 있지만, 내가 고3이던 그때는 대학을 가려면 우선 대학 예비고사에 합격해야 대학에 지원할 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 겨울처럼 혹독하게 추운 적은 없었다.
나는 유난히 학교 복이 없는 편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아버지가 쓰러졌다. 방과 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나를 불렀다. 부모님께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 너를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했지만, 우리 함께 고민해보자 했다. 선생님은 2차에서도 삼류에 해당하는 학교에 지망하면 입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라 차비도 안 들고 좋다며 나를 설득했다. 가장 친했던 내 친구는 부산여중을 갔는데 나는 결국 동네사람들이 똥통이라고 부르는 그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중에 고등학교 입학시험 원서는 울면서 내 의지를 관철했다. 1차 부산여고 원서를 내었다. 나는 너무나 당당하게 떨어졌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실실 웃음이 난다. 내가 시험에 떨어져서 못 갔기 때문에 여한이 없고 내 의사가 반영되어 존중받는 기분이었다. 우리 집의 학교 선택 조건은 무조건 걸어서 갈 수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래야 학교를 보내준다고 했다. 이제는 부모님의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가끔 사직야구장으로 야구 구경을 갔었다. 4번 타자의 홈런보다 9회 말 역전 게임은 정말 흥분되고 볼만 했다. 내 인생에도 9회 말 역전의 기회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꾸었다. 몇 년 뒤 한 번 더 꿈틀거렸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초급대학에 진학했다. 마지막 학기를 남겨놓고 타석에 서서 공을 치려던 순간 방망이가 꺾이고 말았다. 부모님은 혼기가 늦어져 공부보다 결혼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2점짜리 안타라도 한 방 때리고 싶었는데 내 의지는 약했다.
지금까지 내 손으로 대학교를 졸업시킨 사람이 여덟 명이나 된다. 막상 나는 공부를 끝마치지 못하였지만, 누군가를 뒷바라지하는 일도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여덟 명의 타자를 무사히 홈인시킨 게 꿈같다. 타의에 의해 시작된 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코치로 감독으로 생활하기까지 딱 41년이 걸렸다.
나 대신 홈런을 때려줄 1번 타자는 오빠였다. 부모님은 집안의 기둥이며 장남이었던 오빠한테 거는 기대가 무척이나 컸다. 2살 위였던 오빠 역시 원하던 곳이 아닌 등록금이 싸다는 이유로 국립대학을 지망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특차였던 해양대학에 붙기만 하면 외항선의 선장이 되어 돈을 많이 번다고 했다. 오빠가 졸업할 동안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며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1번 타자였던 오빠는 성공적으로 홈런을 날렸다.
2번 타자는 막내 시누이였다. 80년대 한국은 새마을 사업으로 경제가 고속도로에 막 진입하였다. 그때는 여자도 대학을 가는 추세였다. 첫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잠이 쏟아지는 걸 참으며 새벽부터 막내 시누이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늦은 밤 학원수업을 마치도 돌아올 시간이면 버스 정류장에 서서 기다리곤 하였다. 가로등이 없는 골목길을 무서워해서 자주 마중을 나갔다. 딸 다섯의 외동아들이었던 남편은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것과 동생들의 학비마저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아가씨 등록금을 위하여 6개월 만기 적금을 들고나면 살림은 빠듯했다. 집안 살림이 힘들었지만, 참고 견디는 일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3번 타자는 후보선수 명단에도 없던 사람이 타석에 섰다. 다섯 시누이 중에서 셋째 아가씨였다. 아가씨는 여고시절 몸이 아파서 한해 학교를 쉬었다고 했다. 몸이 약해서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하고 건강문제로 대학은 포기했다고 했다. 아가씨가 선을 보러 나가면 고졸이라서 몇 번 퇴짜를 맞았다. 시어머님은 몸이 약한 딸이 장사하는 집이나 시집살이에는 딸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아가씨가 대학을 가게 되었다. 아가씨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달에는 결혼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기도 했다. 결국 어머님의 소원대로 둘만 사는 단출한 곳으로 결혼하였다. 아가씨는 나와 달리 결혼 후에도 학교를 계속해서 다녔다. 금전적인 부담은 친정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경우였다.
야구에서 가장 장타력이 있다는 4번 타자는 어이없게도 남편이었다. 남편이 군 제대를 하고 오니 시아버님의 사업이 기울어져 복학하지 못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동안 세 아이가 태어났다. 남편의 사업이 그런대로 잘 풀렸고 경제적인 문제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쯤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고 술을 먹고 오는 날이 많아졌다. 자주 부부싸움을 했고 시집의 모든 일거리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어느 날 남편이 술을 먹고 넋두리를 쏟아냈다. 옛 동창들이나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학벌에서 상당히 위축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정아버지는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사람 소원하나 못 들어주느냐며 적극 힘을 실어주셨다. 조용한 곳에 방을 하나 얻어 남편은 대학 입시준비를 하였다. 다행히 고교 내신성적이 상위권이었고 대입학력고사에서 성적이 좋았다. 88년 딸아이는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남편은 대학교를 입학하게 되었다. 그날로 나는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는 총감독이 되었다. 남편이 하던 사업을 내가 도맡아 해내야 했다. 여전히 시집살이에 세 아이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남편이 졸업하던 날 우리는 함께 울었다.
5번째 타자는 친정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이모! 이모 하며 날 따르던 조카다. 우리 집 근처로 중학교가 배정되었다. 장사하느라 바쁜 나를 대신하여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아이의 공부도 봐주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착하고 공부도 잘해서 있는지 없는지 성가신 일 하나 없이 우리 집에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도 장학생으로 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스스로 책과 옷 정리를 했다. 그 시간은 벽돌을 쌓아 올리듯 반듯했다. 그 아이는 기도를 행동으로 하였다. 열매는 익을수록 단단해지고 나무는 굵을수록 재목이 된다고 하더니 조용한 성품의 그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수녀원에 입교하였다. 지금은 로마 교황청의 초청으로 이탈리아에 유학 중이다.
6번째로 타석에 선 타자는 첫째 딸이다. 딸아이가 중, 고등학교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두각을 나타내었다. 아이 입에서 유학 이야기가 나오자 남편은 딸아이를 떼어놓고는 못산다며 가족 모두 이민을 결정했다. 2001년 우리는 캐나다에 이민했다. IMF로 이민 절차가 늦어져 아이는 한국에서 대학교 1학년을 마친 상태였다. 밴쿠버에 짐을 풀고 3개월쯤 지날 때 내가 응급실에 실려가게 되었다. 갑자기 닥친 통증과 의사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엄마를 대신하여 통역하던 아이가 그 일로 의대를 가겠다고 했다.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기어코 하얀 가운을 입게 되었다. 지금은 한국 환자들에게는 막힘없이 우리말로 진료하고 있다.
7번째 타자는 둘째 딸이다. 좀 쉬울 줄 알았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면서 성적이 하위권으로 떨어지자 아이는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성적이 좋고 안 좋고 떠나서 학교생활을 해내는 것이 문제였다. 섬세하고 예민하기도 했지만, 누구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다. 백인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문자격증을 주는 학과를 선택하기로 했다. 간호학과를 선택하려고 했지만, 사전 직업에 대한 상담결과 아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상담선생은 수학교육학과를 추천하였고 수학과목에서 자신감을 얻자 아이는 차츰 밝아졌다. 집에서 8시간 거리의 대학교 기숙사에 아이를 두고서 그레이하운드로 한국음식을 해서 보내기 시작했다. 물만 먹고 자라는 콩나물처럼 쑥쑥 잘도 커 주었다. 하이스쿨 수학선생으로 근무하다 지금은 밴쿠버에서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다.
8번 타자는 중학교를 마치고 온 막내아들이다. 한국에서부터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운동을 더 좋아했던 아들이다. 전국체전에 나가서 3등을 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발달한 아이인데. 한국사람이 살지 않는 시골에 살다 보니 또래 문화에서 격리되어 외롭게 사춘기를 보내야 했던 아이에게 늘 미안했다. 학교에 가면 동양인이 없는 곳이라 아이는 외톨이가 되었다. 지금도 힘들다는 공대를 졸업한 걸 생각하면 신기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잘해 주었다. 잘 표현하지 않지만, 아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에 미안하고 고맙다. 하루빨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짝을 찾아주길 바랄 뿐이다.
기적! 기적이 일어났다.
드디어 9번 타자로 내가 나서게 되었다. 4번 타자가 홈런을 치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지만, 9번 타자가 홈런을 날리면 그 쾌감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말이 쉽지 9번 타자가 홈런을 때리는 일은 거의 없다. 9번 타자로 타석에 서게끔 용기를 준 사람은 엉뚱한 데서 나타났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망치로 뒤통수를 퍽하고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날도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하는 중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검색란에 비친 신문기사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최근 나이를 초월한 배움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한국 K 사이버 대학의 최고령 졸업자로 대학 생활을 마무리하는 J(77)씨는 도전 정신과 열정으로 배움을 실천하고 있다. 43년 전 유학생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 이민생활을 시작한 J씨는….’ 2014년 2월 한국 K 사이버대학의 최고령 졸업자라고 신문에 소개되어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분되었다.
나보다 거의 스무 살이 많으신 분이었다.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여자라고 학교를 못 가게 했던 부모님을 원망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그분이 온통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77세의 그녀가 이루어낸 ‘인간승리’는 놀라웠다.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그분에 대하여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검색해도 연락처를 찾을 수 없었다. 드디어 그분을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를 찾게 되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전화하였다. 누구시냐. 무엇 때문이냐. 함부로 선생의 연락처를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에 나는 목소리에 진심을 담고 저는 캐나다에 살고 있으며 그분의 신문기사를 보고 직접 그분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연락하게 되었다. 도와달라며 정중히 부탁하였다. 조금 있다 다시 전화하면 그분에게 물어보고 답을 주겠다고 했다. 기다리는 5분간의 시간이 몇 시간만큼 느리게 흘렸다.
드디어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발신음이 들리고 수화기 건너편에서 “헬로우”하였다. 이름을 밝히고 전화를 건 이유를 말했더니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분은 목소리에 힘이 담겨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분 역시 자신이 그렇게 잘해낼 줄을 몰랐다고 했다. 시작이 반이다 시작하게 되면 꼭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멈추지 않고 또다시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하는 중이라고 했다. 몇 시간 동안 전화를 하면서 나는 용기를 얻고 있었다. 그분은 ‘움직이는 물방울은 얼지 않는다’는 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했다. 나도 얼지 않는 물방울이 되기 위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 떨어져 보자 마음먹었다.
야구감독으로 살았던 인생에 사표를 던졌다. 처음부터 야구감독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야구가 좋았고 야구를 사랑했다. 처음 오빠를 위해 야구장을 얼쩡거리며 심부름을 하고 공을 주우러 다니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가끔은 후보 선수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꿈도 꾸면서 야구를 사랑했던 것 같다. 아니다. 야구선수를 사랑했다. 이제 나는 야구감독이 아니라 선수로 타석에 서기로 한다. 나이 육십에 역전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결코 무모한 일도 아니다. 우선 타석에 서서 야구 망방이를 손에 들어야 홈런을 치던지 안타라도 칠 것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홈런을 원하지만, 홈런이 아니면 어쩌랴 안타를 치다 보면 홈런도 날 것이고 홈런을 치지 못하여도 야구는 점수만 나면 이기게 되는 게임이다. 게임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
나는 야구를 잘할 줄 모르고 야구의 규칙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야구감독이 되었듯이 9번 타자도 나 스스로 결정했다. 언젠가는 마운드에 서서 직접 공을 때리는 상상을 한 날이 많았다. 눈치를 보기 바빠서 환경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감독으로서 보람도 있었다. 사람마다 가진 달란트는 다르다. 아마도 나는 선수보다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충분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스스로 드넓은 세상의 운동장에 서서 마음껏 공을 때리고 달리는 선수가 되기로 했다.
2014년 11월 한국에 있는 K 사이버 대학교에 전화하였다. 입학 요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서류준비를 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입학서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늘은 내게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 그동안 받은 문학상으로 문예 특례장학생으로 4년 동안 등록금의 절반을 받을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문학상을 받은 한국일보사와 재외동포재단에 연락하였더니 흔쾌히 수상확인서를 발급해주었다. 아직 합격발표도 나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A4용지를 박스째 사오고 아이들은 등록금 걱정은 말고 하고 싶은 공부만 하세요 하고 응원을 보내왔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3월 둘째 주부터 강의가 시작되었다. 첫날은 목욕하고 정자세로 책상에 앉았다. 늦은 밤 강의에 집중하기 위하여 일부러 낮에 낮잠까지 자두었다. 강의가 늘어날수록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도 있지만, 그 산뜻한 스트레스를 나는 즐기고 있다. 공부를 시작하자 사는 게 즐거워졌다. 내가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하고 내가 건강해야 우리가 모두 건강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라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도 하지 않고 포기한 것은 아닌지. 후회는 한 번으로 충분하다. 잘하는 일보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오래간다고 했다. 홈런이 아니면 어떠냐. 안타도 치고 도루도 하고 가끔은 보너스로 포볼도 있을 것이다. 우선 시작부터 할 일이다. 중간에 어려움이 닥치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 얼지 않는 물방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부딪치고 흘러가야 한다. 40년 전 1번 타자에게 양보했던 그 날, 잠시 쉬었다 가겠다며 찍은 쉼표를 지우고 그 자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하여 정식으로 야구 선수복을 입었다. 나는 지금 6월20일 치르게 될 중간고사를 위하여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읽는 중이다. 저 멀리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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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상소감] 제일 먼저 한국일보 미주 본사의 창사 46주년을 축하합니다.
오늘 제가 사는 매디슨 햇은 영상 35도라고 합니다. 눈이 부셔서 햇볕에 나설 수가 없지만, 수상 소식에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온통 축화의 웃음소리로 난무하는듯합니다.
힘든 이민생활도 글을 쓰면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 왔습니다. 주변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한층 깊어지고 한 줄기 바람에도 깃드는 마음에 놀라곤 합니다. 글에 대한 사랑으로 긴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멋모르고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글은 제게 위로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글을 쓰는 게 두려워졌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인생에 깨달음이 없이는 서술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제 감성의 뜰에 문학의 향기로 채워나가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할 생각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좋은 글을 쓸 것을 다짐합니다. 응모하고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만으로도 매우 즐거웠는데 제 글에 관심을 가져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한국일보 미주본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더 야무지고 알뜰한 꽃씨를 세상에 날려 보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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