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박의 작품
최은희
【행복찾기 / 최은희】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사월이 오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이곳 시애틀에는 벚꽃나무가 많다. 특히 그 대학 캠퍼스에는 유난히 벚꽃나무가 많았다. 벚꽃나무들로 숲을 이루었고, 벚꽃이 만발하는 그 계절이 오면 온통 바깥세상은 핑크빛이었다. 세상은 눈부셨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은 눈꽃 같았다.
오래전, 그 대학병원 병실에서 내다 본 밖의 풍경이 그랬다. 그렇게 찬란한 아름다움도 내 마음에 따라 슬플 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바람에 날리어 흩어지는 꽃잎들은 마치 흩어져버린 나의 미래 같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벚꽃이 피는 계절이 오면 그 시간속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아직도 아프다.
그때 큰아이는 많이 아팠다. 겨우 네살도 안 된 나이에 악성뇌종양으로 뇌수술과 방사선, 항암치료를 거치고 있었으니… 당연히 그때의 상황은 암울했고, 하고 있던 나의 일도 포기해야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했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통 받는 아이 옆에서 그애 손을 잡아주는 것 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이후 오랜 세월, 얼마나 아픈 시간을 견디어야 했는지를….
내가 이곳 시애틀에 온건 1984년 여름이었다. 이제 삼십년도 넘은 세월을 이곳에서 살아온거다. 여기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두아이를 낳고 이룬 완벽한 그림의 한 가정이었다. 남편은 책임감 있고 성실했으며, 총명하고 잘 생긴 아들과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딸까지….
그즈음 나는 미국 생활에 어느정도 적응하며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내 커리어의 야무진 꿈까지 갖고 있었다. 난 젊었고, 모든 게 자신만만했다. 하긴, 사남일녀중에 막내이자 고명딸인 내가 어떻게 부모님을 떠나 홀홀단신, 이 먼 미국땅까지 올 생각을 했을까? 결국 그리 넉넉치 않은 환경 속에서도 기어코 오고야 말았으니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가 하나하나 정리되고, 나의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여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많은 걸 포기 해야만 한다는 걸 알았다. 힘들었던 모든 치료과정을 끝내고, 아이들은 점점 커가고 있었다.
내가 포기했던 건 단지 나의 커리어뿐이었으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이들이 커 가는 시기에는 내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할 일은 쌓였고, 그 자리를 지키느라 분주히 움직여야 했기에, 오히려 그렇게 바쁘게 살았던 그 시간들이 행복한 때였다는 걸 나중에야 실감할 수 있었다.
자라는 동안 아들은 단 한번도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늘 혼자였다. 어느날 남편은 아들이 궁금해 점심시간에 학교로 찾아갔더란다. 그 넓은 카페테리아 안에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먹고 떠들고 하는 그런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아들은 구석진 테이블에 혼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더란다. 그 모습을, 난 지금 상상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남편이 정말로 고마운 건, 그 이후론 늘 점심시간에 학교로 찾아가서 아들 옆에 있어 줬다는 거다.
뇌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로 뇌세포가 손상된 우리아들 같은 경우, 그 후유증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서서히 진행되고, 결코 좋아질 수 없다고 한다. 여자 친구가 생길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혼자 게임을 하고, TV를 봤다. 마치 혼자만의 세상을 만들어놓고 그 밖으로는 나올 생각을 안 하는 아이 같았다. 직장을 갖고, 부모로 부터 독립 할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내 아이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내 곁에만 있었다. 항상 누군가가 옆에 있어줘야 하는 아이였다.
십년이상을 매일 밤 성장호르몬 주사를 놔 주었음에도, 그렇게 성장이 멈춰버린 열여섯살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애와 나의 행동반경은 늘 같았고, 그애 곁을 지키는 이도 늘 나였다. 곁에서 책을 읽고, 뜨개질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나 또한 혼자였다.
남편은 한창 사업 때문에 바빴고, 잦은 출장으로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그리고 내 손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주는 딸이 옆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독립심 강하고 총명한 딸이었다. 지금도 딸을 생각하면 미안한 게 많다.
큰애를 데리고 딸을 낳으러 친정이 있는 서울로 갔는데, 그즈음 아들의 건강도 심상치가 않았다. 미국에 오자마자 큰애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친정엄마 품에 안겨 온 딸은 모유수유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이주일 예정으로 함께 온 친정엄마도 석달을 더 머무르실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큰애한테 신경 쓰느라 막내인데도 살뜰하게 챙겨주지 못한 딸이다. 그런데도 이제는 의젓하게 잘 자라 준 딸이 대견하기도 하고 참으로 고맙다.
딸아이가 대학을 입학하고, 우리 곁을 떠난 후에도 큰애는 우리 곁에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져서 그애 곁을 한시도 떠날 수가 없었다. 많은 시간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는 반복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들이 잠든 후, 무작정 밖에 나가 동네를 걷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걸 잊을 수 있었고,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나만의 시간들이었다. 처음엔 그저 내 가슴 속, 켜켜이 쌓인 답답함을 풀고자 하는 나만의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은 까마득히 오래 전,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가져다주는 것이었고, 달빛의 포근함은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삼십분 정도 걷고 나면 후끈 몸이 달아올라 한겨울에 부는 밤바람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상쾌함이었다. 그나마 틈날 때마다 걸었던 그 시간들이 나를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그러면서 시간은 흘렀고, 난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점점 더 지치고 있었다. 하긴 따져보니 이십년 이상을 아들옆에서 노심초사하며 산 세월이었고, 남편과 단둘만의 외출도 여행도 포기하며 산 세월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은 처음 공부하기 위해 이곳 시애틀에 와서 상상했던 나의 미래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내가 이룬 건 아무것도 없었고, 어느날 문득 거울을 통해 본 나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해진 오십을 넘긴 여인네의 모습이었다.
그때의 난 갱년기의 불면증과 고혈압으로 최악의 컨디션이었고, 하루하루 버틴다는 게 힘든 일이었다. 내 건강을 위해서도 뭔가를 해야만 했고, 이렇게 계속 살 수 없다는 강박이 내목을 치고 올라왔다. 내겐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다. 그때가 내 한계였을게다.
다행히 오랫동안 감당해오던 내 짐을 나눌 남편이 있었고, 시간을 내어 줄 형편도 되었다. 아마 남편도 앞만 보고 달려 왔으니, 고단했을 법도 하다. 우리나이에 보통의 부부라면 노후의 삶을 준비하며 부부 중심의 삶을 살았을 터이지만, 우리에게 해당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항상 아들 옆에 있어야 했고, 이제는 기꺼이 남편이 시간을 내어준다 했다. 너무 오랫동안 집안에서만 살았던 세월이라 나를 위해 어떻게 시간을 써야 할지 몰랐다.
처음엔 눈여겨 봐두었던, 동네 어귀에 있는 공원의 숲속 산책로가 생각났고, 그 숲속을 걸어야겠다 작정했다. 미로와 같은 산책로를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한두시간은 그냥 흘러갔다. 걸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는 이미 상당한 내공이 쌓인 터였다.
생각지도 않았던 수많은 내 옆의 보석같은 존재들이 눈에 띄었고, 어느 날인가는 그 숲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비오는 날이면, 안개에 휩싸인 그곳은 마치 나를 감싸 안을 듯 가까이 다가와선, 이젠 괜찮다고, 애썼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 공원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바닷가까지 이어지는데, 어느날은 그 바닷가 벤치에서 책을 읽었다. 햇살은 따사로왔고,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비릿한 바다내음이 났다.
몇 발자국만 나서면 이런 세상이 있었는데, 아들을 핑계로 자기연민에 빠져 산 세월이 안타까웠다. 나를 위해서도, 아들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좀더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작정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이었고, 더할 수 없는 행복으로 다가왔다.
그 숲은 날마다 나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고, 매일매일 숲속을 헤매다 나왔다. 숲의 정기가 느껴졌다고 할까? 그런 시간들은 내 오랜 삶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과정이었음을 한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막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시애틀에는 로키산맥에서 뻗어나온 수 없이 많은 산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으뜸인 산은 산중턱까지 만년설을 이고 있는 레이니어 산이다. 아주 잘 생기고 높은 산이라, 날씨가 맑은날 운전을 하고 가다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산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번쯤은 가고 싶어하는 곳인데 고소증도 있고, 해마다 조난사고가 빈번한 곳이다. 아직도 찾지 못한 많은 시신을 품고 있는 산이라고 하니, 그만큼 위험해서 섣불리 오르겠다 덤빌 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한번 올랐던 적이 있었는데, 몸을 지탱하기 힘들 정도의 매서운 칼바람과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라 중도에 포기하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좀체로 갈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산을 오르면서 느끼는건데, 높은 산에는 저마다의 영(spiritual)이 있어 허락된 사람만이 볼 수 있고,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힘들게 올라간 산에서 구름안개에 휩싸여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눈보라와 비바람으로 헛걸음을 하는게 아닌가하며 올라가보면, 거짓말처럼 쨍하니 맑은 날씨로 기막힌 경치를 보게 해줄 때도 가끔은 있었다.
이곳은 유난히 비가 많은 곳이라 무성한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산에는 골짜기마다 물이 넘쳤고, 가파른 산 정상에 호수를 숨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땀 흘리고 힘들게 올라온 자들에게만 허락된, 마치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거부 하는 듯 했다. 태고적부터 품고 있었을 그 호수들은 이제껏 본적 없는 순수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었다.
이십오년 넘게 살고 나서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다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새삼 하이킹을 좋아하게 된 내가 이곳에 살고 있는 게 행운처럼 여겨졌다.
이런 시간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는지…. 오랜 세월 어쩔 수 없이 가슴 조이며 살아온 세월에 대한 보상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행복찾기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 후로 많은 산들을 오르내렸고, 산길을 오르면서 땀으로 흥건하게 적셔진 옷의 감촉은 묘하게도 내 젊은 시절의 혈기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다리근육은 뻐근하고 피곤했지만,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나에게 허락된 이시간들이 얼마나 귀한건지 알기에, 아무 의미없이 그냥 흘러 보내긴 아까웠다. 나의 불면증과 고혈압도 사라졌고, 마른 꽃 같았던 내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에너지 넘치는 나의 몸놀림은 남편에게도 꽤나 놀랍게 보였나 보다.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과 응원은 이 세상 끝까지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하고싶은 많은 걸 꿈꿀 수 있게 되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2014년 3월 어느 날, 난 네팔 촘롱의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어코 난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팔일 동안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의 트레킹 중 삼일째 되는 날이다. 매일 여덟시간 이상을 걸어서 산장에 도착하면, 먹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몸이 지쳐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었는데, 펄펄 끓는 물을 용기에 담아, 그것을 난로 삼아 품에 안고, 아주 달게 자는 그런 밤들이었다.
아침에는 화창한 날씨속에 걷다가도, 점심 후엔 여지없이 내리는 빗속을 걸어야 하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산장에 도착하는 저녁엔 모든 것이 구름 속에 숨어있다 밤이 되서야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래서 그 새벽 그 산과의 첫번째 조우가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을게다.
안나푸르나산은 장엄함이란 말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자태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 또한 이 여행이 끝나기 전, 한번쯤은 별들을 보며 잠들었으면…. 그런 바램을 갖게 하는 황홀함이었다. 산 뒤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마주하며 내가 이곳에 와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고, 남은 여정이 무사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오르막 내리막 걷는게 수행인양 묵묵히 천천히 한발 한발 내딛었고, 끝없이 이어진 그 길을 걸으며 내 어린 시절이 그리움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이곳까지 달려올 수 있었던 내 지난날이 생각나자, 이제는 지나가 버린 내 청춘이 서러웠다. 마을을 지나며 해맑게 웃으며 다가왔던 아이들은 내 어린 시절 그 모습이었고, 찐 계란과 감자같은 소박한 밥상은 그동안 우리가 먹었던 음식이 과한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고소증으로 힘들고 지치는 나날들이지만, 이 여정이 끝날 때쯤이면 말할 수 없는 희열로 다가온다는 걸, 난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화장실이며 음식들, 부족한거 투성인데도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렇게 걷고 있는게 아닐까? 이 또한 지나가면 다시는 못올 시간인데….
최대한 가슴속에, 내 기억속에 담아 와야겠다 작정했다. 그 베이스캠프는 팔천미터 이상의 고봉을 가진 설산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산들의 위용은 대단했고, 웅장함과 거대함은 우리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거였다.
거기에는 안나푸르나산을 등반하다 조난당한 우리 젊은이들의 기념비가 있었는데, 아들 또래의 젊은 나이에 그곳에 묻힌 그들의 죽음이 아프게 다가왔다. 우리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묵념을 드리고 그곳을 떠나올 수 있었다. 몇년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내가 이 자리에 서있다는 것이 꿈같이 느껴졌고, 내 앞에 펼쳐진 이 광경들은 기적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 오랜 행복찾기의 끝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산행을 같이하며 만난 사람들, 그들도 저마다의 상처 한두개쯤은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행복찾기에 열심인 그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에게서 많은 용기를 얻었고, 어떤 이는 나에게서 자극을 받았다 한다.
이렇게 사람들과 어우러져 살면서 느끼는 즐거움도 나에겐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예전엔 한때 내 인생은, 조금은 특별하다 느꼈고 대부분은 힘들고 불행하다 느꼈다. “어쩔 수 없이 살아지는 거다”라고만 생각되었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관심 밖이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 처한 삶이라도 각자의 의지에 따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이제는 더 이상 특별하지도 불행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내 인생임을 안다. 여전히 큰애는 아프고 힘들게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지나보니 알 것 같다.
내가 거쳐온 힘든 그 세월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에 아주 작은 것까지도 감사함이 있고, 행복으로 다가온다는 걸 안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상처뿐이 아닌 강인함 또한 가져다주었다는 걸, 이제는 느낀다. 어떻게 보면, 평범함이 비범함보다 더 힘들 수 있다.
남편은 뒤곁에 암닭 여섯마리를 키우며 매일 낳은 신선한 계란으로 아침을 먹는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아들과 골프를 하며, 외출할 수 있는 날이면 점심을 함께 하고, 가끔은 영화도 같이 본다. 나는 텃밭을 가꾸며, 그림을 그리고, 산책을 한다. 그리고 매일매일 우리 세식구의 따듯한 저녁을 짓는다. 더할 수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다. 다만 아쉬운 건, 아들의 행복찾기도 대신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고, 다만 그 옆자리에 오래도록 있어 주는 것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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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 나이에 와서야 알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젊었을 때 알았으면, 지금보다 좀더 나은 인생이 되어 있을까? 아직도 제일 가치있는 시간들이 지금 현재이고, 내가 뭔가를 할수 있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때때로 잊고 산다.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에 내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작정하고 준비했던 일주일여의 그 시간들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가치있는 거였다. 밥 먹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글쓰는 데 몰입했던 열정의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가작 입상이란 덤까지 얻었으니,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략적인 내 인생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마치 켜켜이 쌓인 먼지 속 옷더미에서 옷 하나하나를 꺼내어, 탈탈 먼지를 털어버리고, 입을 수 있는 옷들만 보기 좋게 접어, 서랍장에 정리해놓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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