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남북한 간의 고위급 ‘무박4일’ 회담에서 북한 측이 종전과 달리 이빨을 드러내지 않고 꼬리를 고분고분 내렸다. 1차 북핵 위기 상황이었던 21년 전 같은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특사교환 실무회담에선 북한대표 박영수가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공갈했다. 김영삼 정부의 호들갑으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됐고, 국민들은 사재기 바람을 일으켰었다.
북한은 2년 전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청와대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했고 그 전에도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 5도와 남한의 수도 서울은 물론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를 불바다로 만들겠다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지금은 북한의 ‘서울 불바다’ 공갈에 한국정부가 겁먹지 않고 국민들도 동요하지 않는다. 사재기 열풍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지금 워싱턴 주가 불바다가 되고 있다. 물론 북한이 워싱턴 주를 워싱턴 DC로 착각하고 핵폭탄을 발사한 건 아니다. 하지만 피해상황은 가히 핵폭탄 급이다. 서울 전체(233 평방마일)보다 두 배나 넓은 450여 평방마일이 불바다가 됐다. 로드아일랜드 주보다도 넓다. LA(500 평방마일)와 런던(600 평방마일)에 비견되는 어마어마한 넓이다.
지난 주말 인디펜던스 호수를 거의 10년만 에 다시 찾아갔다. 고속도로와 산간 하이웨이를 거쳐 비포장 길을 5마일 가량 기어들어가는 심심산속이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차에서 내려 등산로에 들어서자 고래의 아름드리나무들이 빼곡하게 하늘을 가렸다. 집에서 불과 두 시간 반 거리의 별천지다. 예전처럼 호수 주위에 캠핑객 텐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투명한 수면 위에 안개가 어른거렸다. 땡볕인데 안개라니? 캠핑객들이 점심 준비를 위해 모닥불을 피운 모양이다. 연기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것도 아니었다. 워싱턴 주엔 야외 모닥불 금지령이 발효 중이다. 연기의 정체는 다시 두 시간 반 걸려서 정상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알았다. 동북쪽 셸란 호수 일대를 휩쓸고 있는 전대미문의 산불이 뿜어낸 연기였다.
산행 목적지인 두 번째 호수 노스 레이크로 가면서 트레일 정상에서 바라본 셸란 쪽 하늘이 불그레했다. 산 아래서 맡았던 연기냄새도 짙어졌다. 인디펜던스 산의 기암절벽은 코앞에 뚜렷하게 보였지만 멀리 둘러친 베이커, 쓰리 핑거스, 글레이셔 등 명산고봉은 흐릿했다. 캐스케이드 산맥을 넘어 연기가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셸란 산불이 크긴 큰 모양이다.
인기 피서지인 셸란 호수는 좁고 긴(50.5 마일) 모양으로 워싱턴 주 호수 중 가장 크다. 꼭 두달 전 주변 산에서 번개로 발화된 산불이 계속 번지며 산림 8,800여 에이커를 태웠다. 그건 약과다. 그보다 동쪽에서 일어난 다섯 개 산불을 총칭하는 ‘오캐노간 콤플렉스’ 산불은 28만여 에이커를 태워 워싱턴 주 역사상 최악의 산불을 기록한 후 계속 확산 중이다.
제이 인슬리 주지사는 물론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워싱턴 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한국전 때 연합군이 참전했듯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소방관들이 산불진압에 ‘참전’했다. 역시 한국전 때 정부가 학도의용군을 모집했듯이 인슬리 주지사는 주민들에게 의용소방대에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와중에 청년 소방관 3명이 사고로 순직했다.
번개는 지상에 매일 10여만 번 내려치며 이중 10~20%만 화재를 일으킨다. 산불도 5건 중 4건이 인재이다. 숲속에서 담배를 피거나 캠프 모닥불을 제대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방화도 있다. 미국에선 매년 평균 120만 에이커의 산림이 소실된다. 1825년 메인 주와 뉴 브룬스윅 주(캐나다)의 300만 에이커를 태운 산불이 사상 최대 규모 중 하나로 꼽힌다.
그날 산에서 내려오며 다시 만난 인디펜던스 호반의 거창한 나무들이 올라올 때보다 더 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도끼날을 전혀 겪지 않고 태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이 숲에도 산불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서울 불바다’를 위협하고 꼬리 내리는 북한보다 예고 없이 워싱턴 주 산을 불바다로 만드는 자연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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