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토박이다. 우면산이 내다 보이는 조용한 동네에서 태어나 이사 한번 안하고 스물 다섯해를 보내면서 단 한번도 그 동네를 벗어나 사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외국은 고사하고 서울을 벗어나리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당시 내 상상력의 한계라는 것은 잘해야 결혼 후 서울 어딘가 조용하고 예쁜 동네에 둘만의 새 보금자리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런 내가 외국, 그것도 태평양 한 가운데 동동 떠 있는 작은 섬에서 10년째 비교적 평화롭게 일상을 일궈가고 있는 걸 보면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란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지상 천국, 파라다이스, 꿈의 낙원 등은 하와이의 흔한 별명들이다. 하와이에 산다고 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행여 하와이에 살아 아쉬운 점을 말하기라도 할라치면 그런 곳에 살며 무슨 불만이 있느냐는 시선이 느껴져 하려던 말은 목구멍 아래로 쏙 들어가고 만다. 아닌게아니라 하와이에서의 삶은 천국의 그림과 닮은 부분이 많다. 1년 365일 화창하다 못해 화사한 날씨에 곳곳에 피어있는 플루메리아,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탐스런 열대 과일, 여기에 삶을 대하는 하와이 사람들의 여유와 온화로움까지 더해져 유토피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하와이와 매우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제 아무리 지상 천국이라한들 나고 자란 내 나라 내 땅만큼 좋을 수 있을까. 업무나 휴가차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한국에 다녀오는데도 가슴 속에는 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그건 한국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라기 보다는 나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의 추억에 대한 심상적 그리움일 것이다. 아무리 친절하고 다정한 이웃집 백인 할머니라도 한국에서 만나는 시골의 욕쟁이 할머니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욕쟁이 할머니와 내가 모국어라는 같은 언어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움이 단순한 그리움에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지 않고 집요하게 내 속을 파고들어 혹자는 향수병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우울증이라고도 하는 증상을 앓게 된 것은 하와이 생활 3년차에 들어섰을 즈음이다. 첫 1-2년은 꿈결 같은 이국의 섬에서 펼쳐진 신혼의 단꿈에 젖어 마냥 행복했다. 하지만 콩깍지가 벗겨지고, 무지개가 걷혀진 외국에서의 삶은 지루하고도 고단했다. 이방인이라는 말에는 본질적인 쓸쓸함이 있다. 일평생을 보낸 나의 공간을 떠나 다른 언어를 쓰는 다른 모습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삶에는 어쩔 수 없는 서글픔이 있다. 뒷자리에 있던 친구에게 휴대폰을 건넸을 뿐인데 운전 중 통화를 했다며 경찰에게 심문을 당하거나 공공기관에서 덩치 큰 외국인에게 새치기를 당했을 때, 왜 나는 좀더 당당하지 못했는가, 당차게 대꾸하지 못했는가 울화가 치밀었다. 통번역을 업으로 살고 있으니 영어 의사소통에 불편함이 없는데도 당황한 순간에는 한국어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로 인해 겪는 서글픔이나 억울함이 도를 넘으면 우울감과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내게 당신 잘못이 아니니 신경쓰지 말라 위로했지만 기실 그 말이 그리 위로가 되진 않았다. 그 누구보다 내 자신이 한심하고 못나게 느껴져 자다가도 허공에 대고 발길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다시 그를 만나면 이렇게 쏘아붙여 줘야지, 하며 혼자서 상황극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다시 만나는 일 따위는 절대 일어나주지 않았다.
한국에서였다면 그냥 운이 좋지 않았다며 넘어갈 만한 사소한 일이 나의 하루를, 일생을 잡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모멸감을 느끼거나 외로움이 극에 달하는 날엔 급기야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으로까지 번졌다. 누가 등떠밀어 하와이에 온 것이 아닌데도, 아니 오히려 사랑에 눈이 멀어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해 하와이 행을 추진했던 건 나 자신인데도, 외국에서의 삶에 대해 ‘경고’해주지 않은 남편을, 엄마를, 친구들을 원망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찾아간 정신과 전문의는 우울증 초기 증상이라며 마음가짐이나 상황, 이 둘 중 하나를 바꾸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의 말이 맞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없다면, 외국에서의 삶이 그토록 싫다면 익숙한 내 나라로 돌아가면 될 터였다. 마음 가는대로 살면 행복은 따라온다는 평소의 신조를 따라서. 하지만 혼자가 아닌 엄마의 삶을, 아내의 삶을 시작한 이상 마음가는 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늘상 답답하고 우울한 상태로 매일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다. 더없이 성실하고 선량한 남편에게, 착한 아이들에게 화사하게 웃어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기분으로 살아가던 중에, 우연한 기회에 맥컬리 도서관을 찾게 됐다. 도서관 내 가득한 이국어의 책들 너머로 ‘한국어 도서 코너’라는 푯말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얼핏 봐도 수천여권은 됨직한 한국어 도서가 칸칸의 서가에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아, 그때의 그 벅찬 감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도종환, 시 <흔들리며 피는 꽃> 중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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