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오하, 2천여개 와이너리 가족이 대대로 운영
▶ ‘구겐하임 뮤지엄’으로 연간 100만명 찾아와 기사회생한 도시 빌바오
【SPAIN ④ 리오하와 빌바오】
스페인어로 리오(rio)는 강이란 뜻이고 오하(oja)는 계곡이란 뜻이다. 리버 밸리라는 이름의 리오하(La Rioja)에서 보낸 닷새는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특별한 시간들이었다.
스페인 북부의 리오하는 레드 와인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와인 산지는 어딜 가도 모두 아름답지만 리오하는 유난히 드넓은 풍광이 평화롭고 여유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니는 곳마다 눈에 거슬리는것 하나 없이 조용하고 순박한 시골의 매력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어서 지금도 리오하를 생각할 때면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절대적인 평화가 느껴진다.
스페인은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와인생산량이 3위인 나라다. 포도밭 면적으로는 세계 최대이며 리오하 외에도 헤레즈, 페네데스, 리베라 델 두오로 등 여러 산지에서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로마시대 이전부터 와인을 만들어왔으나 130년 전 보르도 양조업자들이 리오하로 몰려 내려오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맞았다. 당시 보르도는 필록세라(포도나무 진드기)가 휩쓸면서 양조산업이 전멸하자 대체할 땅을 찾다가 기후와 땅이 비슷한 리오하에서 새롭게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10년 후 리오하 사람들은 보르도의 포도 재배법과 양조법을 다 배웠고, 그때부터 현저하게 맛이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리오하에는 2,000여개 와이너리가 산재해 있는데 거의 다 한 가족이 대대로 운영하는 작고 알찬 곳들이다. 정부에서 양조법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어 품질도 우수하고, 영리나 상업성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전통과 철학 대로 와인을 만드는 분위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무가(Muga), 로페즈 데 헤레디아(Lopez de Heredia), 비나 안네(Vina Ane)등 3곳의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무가와 로페즈 데 헤레디아는 상당히 큰 와이너리로, 양조시설과 지하 셀라가 엄청난 규모여서 돌아보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특히 두 와이너리 모두 직접 오크통을 만드는 쿠퍼리지 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점이 놀라웠다.
리오하 와인의 맛은 미국에서 맛보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물론 훨씬 맛있었다는 말이다. 템프라니요와 가르나차를 주 품종으로 만드는 레드와인은 너무 진하지도 연하지도 않은 딱 마시기 좋은 정도, 카버네 소비뇽과 피노 누아의 중간 느낌이지만 맛과 향이 개성적이며 세련된 맛이었다. 이 사람들은 와인을 아주 잘 알고 제대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화이트 와인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비우라, 말바시아 같은 품종으로 만드는 리오하의 화이트 와인은 오래 숙성시킴으로써 부드러워졌으나 바디와 산도가 놀랍게 살아 있는 아주 특별한 맛을 냈다.
더 감동스러운 것은 이런 세련된 맛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어느 식당의 와인 리스트를 보아도 미국에서처럼 터무니없는 가격은 찾아볼 수가 없고, 대충 시켜도 음식과 함께 맛있게 매치되는 와인들이 많았다. 리오하는 기회 되면 꼭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인근 마을 브리오네(Briones)에는 와인 애호가들에겐 꿈의 놀이터와도 같은 와인 뮤지엄(Museum of the Culture of Wine)이 있다. 비방코 와이너리가 2004년 개관한 이 박물관은 와인이라는 신비한 음료를 주제로 하여 역사, 문화, 전통, 예술, 양조기구, 심지어 잔과 병과 코르크까지,아무튼 와인에 관계된 것이라면 뭐든지 다 엄청난 컬렉션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고대 유물로부터 중세, 현대에 이르는 수천년 양조역사에서 사용됐던 다양한 도구들이 6개 룸으로 나뉘어 전시돼 있고, 바깥 정원에는 200여종에 이르는 포도품종을 심어놓고 있어서 와인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리오하 지역에는 중세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보석처럼 아름다운 작은 마을들이 많이 있다. 마치 영화 세트 속에 들어온 것처럼 골목마다 예쁜 상점과 식당들이 늘어선 라과르디아(Laguardia)에서는 산타마리아드 로스 레이스(Santa Maria de Los Reyes) 성당에서 돌조각해 채색한 파사드를 구경했다. 스페인에 2개밖에 없는 채색 파사드라고 하는데 너무 특이하고 아름다워서 이걸 본 것만으로도 여행 온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 에즈카라이(Ezcaray)에서는 다같이 메리노 울로 짠 질 좋은 스카프와 담요들을 열심히 샤핑함으로써 인구 2,000명도 안 되는 소도시의 경제에 기여했다. 이 작은 마을이 17~18세기에는 스페인 왕실과 군대의 울생산을 전담했던 곳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깨끗하고 조용하고 아름답던지, 시에스타 시간에 텅 빈 골목골목을 혼자 걸으며 여행 중 드문 한가로움을 만끽했다.
리오하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반 올라가면 스페인의 최북단 도시 빌바오가 나온다. 언어와 문화가 크게 다른 바스크 지방의 주도로, LA 건축가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지은 구겐하임 뮤지엄(Guggenheim Museum)하나로 기사회생한 도시로 유명하다.
그런데 우리가 리오하에서 5일간 묵었던 마르케스 데 리스칼(Marques deRiscal) 호텔도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라,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날아간 스페인의 북부 도시에서 그의 건축물들과 조우하는 기쁨이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건축가이며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로 꼽히는 프랭크 게리는 세계 관광지도에 리오하와 빌바오를 새겨 넣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빌바오는 과거 무역의 중심지이며 광산업과 제철업으로 엄청난 번영을 누렸지만 20세기 말 철강산업이 쇠퇴하면서 침체되기 시작, 공해와 실업률이 가득한 지저분한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죽어가던 이 도시가 살 길을 찾기 위해 마침내 과감한 도박을 했는데, 시 전체 자원을 투자해 구겐하임 뮤지엄을 도시로 유치한 것이다.
과연 1997년 프랭크 게리의 건축물이 완공되자 빌바오의 이미지는 완전히 탈바꿈했고, 이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잇달아 멋진 건물을 짓기 시작해 지금은 연간 100만명이 찾아오는 관광지가 됐다. 이것을 ‘빌바오 효과’라 부르며 많은 도시가 벤치마킹하고 있다. 사실은 월트 디즈니 홀도 오랫동안 건축이 중단돼 있을 때 구겐하임의 성공을 보고 재정모금이 활기를 띠기 시작해 완공됐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빌바오 구겐하임은 195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인데 솔직히 말하면 건물 내 전시보다 바깥에 설치된 다양한 작품들이 더 눈길을 끈다. 입구에 4만송이의 꽃나무로 만든 제프 쿤스의 거대한 ‘강아지’가 있고 반대쪽 입구에는 아니쉬 카푸어의 ‘큰 나무와 눈’이 있다. 강가쪽 테라스에는 제프 쿤스의 또 다른 작품 ‘튤립’이, 그 옆으로 니키 드 생팔의 ‘여신들’, 아래쪽에 루이스 브루주아의 거대한 철제거미 ‘마망’이 있다. 뮤지엄 1층 거대한 전시장에 영구설치된 리처드 세라의 8개짜리 대형철제작품 ‘시간의 문제’ 역시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설치물이다. 사람들은 전시에 별 관심 없이 안팎으로 특이한 디자인의 건축물과 재미있는 설치작품들을 구경하고 사진 찍느라 시간을 다 보내는 것 같았다.
<글·사진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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