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덴버에서 열린 공화당주지사협회 미팅에서 최대 난제로 떠오른 이슈는 “대선후보 첫 토론회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하이재킹 당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까”였다. 3명 선두권 후보들이 “트럼프가 참여하면 보이콧 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어느 후보 진영도 이 같은 ‘단합’에 솔깃해 하지 않았다. 각기 이해관계가 달랐고 그럴 경우 트럼프를 ‘순교자’로 만들 역풍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이들이 과연 경력과 지성을 갖추었다는 대통령 재목들인가 싶게 셀폰 갈아 부수기에서 세법책자 화형식에 이르기까지 나머지 후보들의 기행과 막말 경연전이 인터넷을 달구었다.
앞으로 딱 한 주 남은 첫 후보토론회를 둘러싼 소동의 단면들이다.
토론회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미디어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후보의 민낯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여서 지루한 선거전에서 흥미로운 이벤트로 꼽히기도 하고 TV시청률도 높은 편이다. 금년 공화당의 경우 초만원 경선 후보들의 공식적 첫 만남이기도 하고, 이번 첫 토론을 계기로 혼란이 정리되고 거품이 꺼지면서 본격 대결의 새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초반부터 예년과는 다른 변수들이 등장했다.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선 20~23회나 개최했던 토론회 횟수를 이번엔 9회로 대폭 줄였고 “성적순 10명”이라는 토론 참석 커트라인까지 들이대고 있다. “대선후보 토론다운 토론”을 보여주려는 당 지도부의 의중이 담긴 공화당전국위의 기획이었을 것이다.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리는 8월6일 토론회 당일까지는 희비가 엇갈리면서 애타는 한 주가 될 것이다. 주최 측인 폭스뉴스가 이틀 전인 4일 늦게 10명 합격자에게 토론회 참석 초청장을 전달하게 되는데 이날 오후 5시까지 발표되는 전국여론조사 5개의 결과를 종합한 지지도 평균이 각자의 성적이다.
트럼프 돌풍에 휘말린 경선필드는 이미 지도부의 플랜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전쟁포로 비하’ 막말에도 불구 여전히 선두를 지키고 있는 트럼프와 마이크 허커비, 벤 카슨, 테드 크루즈 등 당의 엘리트층이 경시하는 후보들은 모두 10위권에 들어 있고 여성 기업인, 인도계 이민,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경합지역인 오하이오의 인기 있는 주지사 등 공화당의 다양성을 과시할 수 있는 요소로 지도부가 꼽은 후보들은 탈락의 위기에 처해 있다.
큰 돌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8위까지는 거의 정해진 상태다. 정치사이트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7월25일까지의 5개 여론조사를 종합한 지지도 순위에 의하면 트럼프가 19.2%로 여전히 1위다. 13.4%의 젭 부시와 12.6%의 스콧 워커까지 선두권 3명은 참석티켓을 확보했고 뒤를 이어 7%의 마르코 루비오, 6%의 카슨, 5.8%의 허커비, 5.5%의 론 폴, 5%의 크루즈까지 중위권도 안전지대에 속해 있다.
릭 샌토럼에서 조지 파타키까지 최하위권 5명은 아예 포기하고 토론회에 앞서 프리게임으로 진행될 1시간짜리 ‘2부 리그’에 대비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피 말리는 한 주 동안 필사의 서바이벌 게임을 펼쳐야하는 후보들은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에 걸려있는 3명의 전현직 주지사다. 토론회에 참석 못할 경우 향후 캠페인은 “유리 천장도 아닌 콘크리트 천장에 막혀버리는 셈”이라고 한 정치 컨설턴트는 경고한다.
셋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후보는 3.2%의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다. 지난 대선에선 공화당 실세들이 그의 출마를 간청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위권을 못 벗어나고 있다. 옛날을 그리워하며 앞으로 한 주 100만달러를 쏟아 붓는 광고전에 운명을 걸고 있다.
지난주 출마발표 때 받아야했을 뉴스조명을 트럼프의 막말소동에 빼앗겨 버렸던 존 케이식 오하이오 주지사는 이번 주 뉴햄프셔 여론조사에서 3위로 뛰어올랐다. 전국지지율 평균은 2.4%, 트럼프를 “도려내야 할 보수주의의 암”이라고 몰아치며 트럼프 저격수로 나선 릭 페리 전 텍사스 주지사보다 0.4% 앞서있다. 막말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 페리의 막말은 지지도 상승에 별 효과를 못 내고 있다.
토론회 티켓을 확보한 후보들의 속도 그리 편한 것은 아니다. 트럼프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 모든 후보의 참모들이 ‘트럼프 대처 전략’ 수립에 고심하고 있다. 2시간짜리 ‘도널드 트럼프 쇼’의 들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토론의 달인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뉴트 깅리치의 조언은 두 가지다 : 첫째 자폭 주의! 분노 폭발에선 트럼프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최대로 트럼프를 무시하고 성숙하고 진지한 자세를 견지하라. 둘째 트럼프가 아닌 유권자와의 소통, 자신의 메시지 전달에 집중하라.
10명이 난립하는 대규모 토론회의 전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4년 민주당과 2008년 공화당 경선 토론회에도 10명이 북적였었다. 후보들의 인상을 비교해가는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이슈에 대한 심층토론은 불가능해진다. “트위터 시대에 걸맞는 토론이 될 것”이라고 줄리언 젤리저 프린스턴 대학 교수는 비유한다.
내주 토론의 최대 관전포인트는 트럼프의 진화여부다. 정책토론에서 이슈를 제대로 파악 못하고 헤맨다면 그는 자연히 도태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찔러가며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대선 판도는 확실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해본 적 없는 나도 선입견을 버려야 하는데…갑자기 다음 주 토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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