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나에게 기쁨과 슬픔, 설렘과 두려움을 안겨다 준 계절이다. 아버님,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손자가 태어났고, 태평양을 건너왔고, 나의 3차 인생이 시작된 게 여름이었다. 이런 극적인 경험들도 평소에는 측두엽 피질 속에 조용히 저장되어 있다. 그러다가 어떤 심한 감정에 휩싸이게 되면 편도체의 자극으로 인해 다시 재생되어 기억으로 떠오른다.
아침에 뒤뜰에서 녹차의 향을 음미하다가 금년 여름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 때문인지 문득 남가주의 의사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기억창고 속에서 튀어 나왔다. 10대 초반에 미국에 온 20대 후반의 동성애 여성 A의 이야기이다.
1.5세인 A는 언어와 풍습이 다른 미국에서 정말 힘들게 사춘기를 보낸다. 그때 한 친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A는 친구와 우정을 넘어 사랑하는 커플이 되었다. 항상 손 붙잡고 다니며 깔깔거리고, 같이 놀러 다니고,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는 소녀들을 보면서 동성애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성인이 된 후 십여년 함께 생활하고 있다. 스마트하고 사교적인 A는 무슨 이유인지 영주권이 없어 안정된 직업을 유지할 수 없다. 항상 무엇에 쫓기는 듯 불안감, 초조감으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좋은 대학을 마친 파트너가 정성을 다해 보살펴주고 있다. 아마 그런 파트너가 없었다면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것이다.
그들이 즐겨 찾는 곳은 두 군데다. 하나는 어려서부터 다녀온 교회, 다른 한 곳은 동성애자들이 어울리는 카페나 음식점이다. 친구 의사의 말에 의하면 적지 않은 수의 동성애자들이 교회를 다니고 신을 믿는다. 동성애 신자들은 자신의 성적지향을 감추고 초대교인들처럼 음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말이면 카페나 음식점에서 다른 동성애자들과 어울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제 대기업 CEO 동성애자, 동성애 주지사, 그리고 성공회 동성애 성직자도 커밍아웃했지만 그녀와 파트너는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고지식한 한인사회에 얼굴을 드러낼 용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동성애자 카페에서 시민권자인 한 남성 동성애자를 만났다. 영주권 문제로 고민하는 그녀에게 그는 자기와의 결혼을 권유한다. 물론 서류상의 결혼이다. 이런 일은 동성애자 공동체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캘리포니아는 연방대법 판결에 앞서 이미 동성애 결혼을 인정하고 있기에 A는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지만 망설이던 참이었다. 남자와 결혼한다고 하면 의심받지 않을 것 같아 그는 결국 몇몇 동성애자 친구들의 축복을 받으며 법정에서 결혼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 게 소망이었으나 마음을 접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합쳐지는 의식이라고 성경은 규정하고 있다.
성경은 또한 양 99마리를 보호하는 것과 똑같이 잃어버린 한 마리 양도 찾으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제적, 심리적, 가정적으로 고통을 안고 살아온 A는 창조주께 의지해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얻으려고 교회를 다니던 어린 양이다.
동성애자들은 법적으론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만 여전히 직장에서의 승진, 은행 융자신청, 사회활동의 제한 등 생활 전반에 걸쳐 차별을 받고 있다. 그들은 신이 정한 전통적 결혼의 의미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과 사람이 결합한 커플로서 평등한 법적권리와 자신이 결정권을 가진 자유인이란 인정을 받고 싶을 뿐이다.
보수 정치가들이야 표를 의식해서 동성애자들을 혐오하지만 종교단체들은 따뜻한 가슴으로 그들을 받아 주어야 한다. 특히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을 구해 주는 사랑을 으뜸으로 여기는 기독교는 차별과 불평등, 편견으로 고통 받고 있는 동성애자들을 감싸는데 앞장을 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지금은 보수적이고 현실에 안주한 이민 1세대들이 교회를 이끌어 가지만, 앞으론 사회적 약자와 소수의 편에 서서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적 사고를 가진 이민 2세들이 이어 받는다. 이들의 발길이 교회로 향하도록 해야 되겠다. 종교를 떠나서도 인간본성의 일부인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타인을 포용하고 도와주는 일이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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