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이 가장 진보적이었던 때는 1950년~1960년대 얼 워런 대법원장 시절이었다. 인종차별과 피의자 인권보호 개선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브라운 판결’과 ‘미란다 판결’등으로 새 역사를 기록했던 워런 대법원의 진보적 판결 비율은 매 회기마다 전체 판결의 70%를 넘었다. 그렇게 20년간 선명했던 대법원의 진보색채는 1969년 워런의 사임과 함께 점차 퇴색했고 이후 40여년, 대법원은 한발씩 오른편으로 이동하며 보수화를 굳혀왔다.
2005년 50세 최연소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존 로버츠의 현 대법원도 가장 보수적 대법원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이 ‘확실한’ 보수 대법원에서 진보적 판결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0월 개정해 6월말 이번 주 초에 끝난 금년회기에 다룬 전체 케이스 중 56%에 대해 진보판결이 나왔다고 보도했고, 대법원 전문사이트 스코투스블로그도 가장 중요한 10케이스 중 8건이 진보 판결을 받았다고 전했다.
예상치 못했던 ‘좌클릭’에 들뜬 리버럴 진영에선 환호성이 울렸고 “진보의 큰 승리” “놀라운 변화”라는 미디어의 분석과 해설이 잇달았다.
이번 회기는 특히 지난주의 3가지 주요판결로 기억될 것이다 : 동성결혼 및 오바마케어 합헌판결과 주택차별 금지법 확대해석에 대한 유효판결이다.
힘없고 가난한 보통사람에게도 평등한 일상을 보장하는 대법원의 결정에 의해 동성커플은 미 전국 50개주에서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주에 살던 상관없이 넉넉지 못한 모든 주민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저가주택 건설금지나 대출관행에 숨어있는 차별을 처벌해 가난한 소수민 아이들도 더 안전하고 더 학군 좋은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이 쉬워지게 되었다.
후세 역사가들이 지난 한주의 중대 판결들을 한 시대의 ‘전환점’으로 평가할 것이라면서 프린스턴대학의 줄리언 젤리저 교수는 “연방대법원은 간접차별 금지로 오래된 진보 정책을 보호하고, 최근의 진보 업적 오바마케어를 정착시켰으며 동성결혼이라는 새로운 민권을 전국에 새겨 넣었다”고 3건의 판결을 통한 진보승리의 의미를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큰 주목을 못 받은 공정주택법 관련 판결도 그는 중대한 진보 승리의 하나로 지적했다. 주택의 판매와 임대시 차별을 금지하는 1968년 제정 공정주택법의 확대해석을 다룬 이번 케이스에서 대법원은 인종차별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과적으로 차별을 초래할 경우 공정주택법에 따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부자동네에 저소득층 위한 주택건설을 금지하는 로컬정부의 정책이나 인종과 성별에 따른 대출금리 차등적용 등이 이 법에 저촉될 수 있다고 판정함으로서 오래된 진보정책의 모호한 부분을 명확하게 보호해 준 것이다.
오바마케어 소송은 백악관이 가장 우려했던 케이스였다. 오바마케어 죽이기에 계속 실패한 공화당 의원들이 “대법원에 맡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보수진영이 큰 기대를 걸었던 케이스이기도 하다. 36개주의 연방거래소 통한 보험가입자의 정부보조금 혜택에 위헌판결이 내려졌더라면 수백만명에 대한 보험료 인상-가입취소-보험시장 붕괴로 이어지는 오바마케어 최대 위협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2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오바마케어를 살려냈다. 분노한 보수진영은 로버츠 대법원장의 ‘배신’을 비난했지만 그는 사법부의 역할이란 야구의 심판처럼 룰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적용하는 것이라며 이 법을 제정한 의회의 의도는 “보험시장 파괴가 아닌 개선”이라는 한마디로 반대를 일축했다.
지난 금요일 동성결혼 합헌 판결로 미 전국을 뒤흔든 대법원의 이번 회기가 ‘진보적’이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지속될 변화인가, 일시적 현상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린다.
미 전체의 여론이 포퓰리즘에 열광하며 진보로 기울고 있어 대법원도 이 같은 사회변화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일각에선 주장한다. 로이터는 이번 판결들의 의미를 “올드 아메리카가 뉴 아메리카에 승복한 것”이라고 정리한다. “미국 역사에서 주변에 머물러온 집단 - 인종적·종교적 마이너리티, 이민자, 젊은 층, 동성애자, 싱글맘…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한 사명감으로 단결된 이들의 연합이 2008년 오바마에게 대선승리를 안겨주며 부상했던 새로운 파워, 뉴 아메리카다”라는 분석이 맞는다면 강경보수 평생직 대법관들이 포진한 대법원에서도 진보의 희망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낙관은 시기상조다. 이번 회기 진보적 판결들이 소송 내용에 따른 스윙보트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의 성향 때문이라면, 계속 비슷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당장 대법원이 예고한 다음 회기 심의 대상엔 공무원 노조, 어퍼머티브 액션, 낙태, 투표권법 등 보수진영의 승리가 예상되는 이슈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민행정명령도 대법원에 서게 될 것이다. 어제 발표된 CNN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성결혼과 오바마케어 판결을 지지하는 응답자는 63%에 달했다. 대법원이 이처럼 여론과 궤적을 함께 한다면 내년 6월 이민사회는 대법원으로부터 낭보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미국태생 자녀의 서류미비 부모들을 추방의 두려움 없이 미국에 살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여론은 75%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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