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희로애락으로 엮여진 인생극장이 소설이나 영화에만 있는 게 아니고 바로 내 주변에 사방팔방으로 두루 퍼져 있다.
환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기쁘고 즐거운 대신 슬프고 화가 서린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많다.그 중에서도 나이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나 평생의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노인을 대할 때는 매우 곤혹스럽다. 예전에 만났던 어느 환자이야기다.
70이 넘은 듯한 노부인이 중년남자의 손을 꼭 붙잡고 진료실로 들어 왔다. 부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중년남자는 말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아직도 슬픔에서 깨어나지 못해 걱정입니다.”의사가 물어보기도 전에 말하는 것이 아들의 성질이 급한 듯 싶었다. 보통 성질이 급한 사람은 참을성이 적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 남을 보살피고 배려하는데 익숙하지 못하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 마음이 불편해 자신의 심정을 잘 안 털어 놓는다. “먼저 어머님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하니 아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환자대기실로 돌아갔다.
“나이에 비해 젊고 고우시네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노부인은 의사의 첫말에 다소 의아한 표정이었다. 여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젊어 보인다고 하면 싫어하지 않는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젊긴…, 그게 무슨 소용인가요, 영감도 없는데.”
“언제 돌아가셨는데요?”
“1년 2개월 사흘 됐지요.”
남편의 사망날짜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부인의 마음을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지금 무엇이 괴롭고, 매일 어떻게 지내시는 지요?”
“사람 만나기 싫고, 세상에 재미나는 게 없고, 죽은 영감 생각하면 내 신세가 시냇물 위에 외로이 떠다니는 나뭇잎 같아 가끔 영감 곁에 가고 싶은 마음이에요.”
부인은 남편과 전문직업인으로 함께 일하다 퇴직 후 만족스런 은퇴생활은 하고 있었다. 골프도 치고, 여행, 교회봉사 등으로 바쁘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숨을 거두었다. 정말 날 벼락이었다.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나아진다고 하지만 1년 넘어서까지 밥 세끼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고, 매일 남편과 지내던 시절만 회상하며, 가끔 남편 옆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아들이 모시고 온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면 대개는 6개월 이내에 심한 죄의식이나 자살충동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나 일상생활로 복귀한다. 반면 계속 슬픔과 외로움에 빠져 괴로워하고,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보이며, 자살위험을 보이면 정신과에서는 ‘연장된 비통(Prolonged grief)’이란 진단을 붙인다.
연장된 비통은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 중 비관적 성격의 소유자, 망자와의 정서적 밀착과 의존도가 높고, 우울증 병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노인과 여성들에게 많이 발생한다. 치료는 이를 우울증의 한 유형으로 보아 항 우울제의 사용과 상담을 통해 비교적 치유가 잘 되는 편이다.
위의 노부인의 연장된 비통은 두가지 요인이 상담의 주된 의제였다. 하나는 아내로서 남편에게 정기의료검진을 강력히 요청하지 않은 것, 다른 하나는 의사와 가족들의 권유로 남편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의료문서에 사인을 한 것이었다.
어린 자식이나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을 방문할 때는 무척 신경을 써야한다. 겉으로 표현되지는 않지만 그들의 내면은 폭발직전의 시한폭탄처럼 정서적으로 압도되어 있다. 때문에 위로한답시고 말을 가볍게 해서는 안된다. 말 한마디가 큰 독이 될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말은 되도록 삼가는 게 좋다.
“저도 비슷한 일을 당한 적이 있어 이해할 수 있군요.”
“모두 하느님의 뜻인 듯 싶습니다.”
“저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고, 감히 신의 영역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비통에 빠진 사람은 도움을 청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청하기 전에 스스로 음식을 준비해 주거나, 빨래를 맡아 해주는 게 진정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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