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짓에 깃든 정신 소개 사상가… 관객 흥을 돋우는 이야기꾼
▶ 영가무도 시연·태평춤 첫 선… 다시 보기 힘든 ‘우리 춤 기품’
이애주 교수가 한영숙으로부터 유일하게 물려받은 태평무의 근원 ‘태평춤’을 추고 있다. <사진 LA한국문화원 제공>
■ 공연리뷰 - 이애주 ‘인문학으로 풀어내는 춤관’
이애주는 춤꾼이며 이야기꾼이었다. 아니 무당이며 광대가 된 것도 같았다.
19일 LA한국문화원(원장 김영산)과 미주한국무용협회(회장 김응화) 공동주최로 아리홀 무대에 선 그는 이야기하고, 소리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자기 속에 쌓인 예술혼의 정수를 거침없이 쏟아내어 관객과 소통했다. 이날 공연을 보러 간 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춤꾼’이라는 수식어의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애주는 80년대 시국춤으로 유명해졌지, 춤은 별로다’란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혼으로 느낀 것은 이애주는 빼어난 춤꾼을 넘어서 철학가요 사상가이며 민족 예술가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춤에는 ‘우리시대’만이 아닌 오천년 한민족의 뿌리와 사위가 삭고 녹아들어 있었는데, 춤만 추는 게 아니라 우리의 소리와 몸짓과 정신을 관객들에게 더 많이 전해 주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순서 하나하나마다 마이크를 들고 설명하기에 바빴다.
‘인문학으로 풀어내는 춤관’이라는 이날 공연의 타이틀이 좀 거창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큰 잘못이었다.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 무명옷을 입고 나온 그는 탁월한 이야기 솜씨로 관객을 압도하며 우리 춤의 근원에 대해, 춤 속에 담겨 있는 홍익인간의 정신과 의미에 대해 강연했다. 춤을 추러 온 것인지, 민족철학 강의를 하러 온 것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그의 이야기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5명의 춤꾼으로 거슬러 올라가더니 환웅과 단군에까지 이르렀고, 그때로부터 한민족에게 전해 왔다는 오행 소리춤 ‘영가무도’를 즉석에서 시연했으며, ‘천부경’(단군 경전)의 전문 81자를 풀어 암송하기도 했다.
그것도 모자라 관객을 죄다 일으켜 세워서는 절하기를 시키기도 하고, “오장육부에서 끌어올린 소리를 내라”며 오행소리(음·아·어·이·우)를 시키기도 하고, 박수까지 치라고 흥을 돋우며 사람들을 들었다 놓았다, 열연을 펼쳤다. 관람석이 모자라 계단과 아리홀 입구까지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은 무대 위에까지 올라앉아 이 특별한 춤판 한마당에 넋을 놓은 모습이었다.
그럼 춤은 어땠는가.
우리 춤을 보면서 가슴 묵직한 감동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춤사위가 달랐고 손과 발의 놀림이 달랐다. 이애주 교수뿐 아니라 함께 공연한 제자 3명(주연희 김연정 김서윤)은 보통 내공이 쌓인 춤꾼들이 아니었다. 모두 대학 교수들이며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이수자와 전수자인 이들은 우아하고 절제된 우리 춤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예의 춤’과 ‘본살풀이’ ‘태평무’와 ‘태평춤’, 그리고 ‘승무’로 이어진 이날 공연에서 이 교수는 우리 춤의 정신과 모든 움직임이 들어 있다는 입춤 형식의 살풀이 기본 춤인 ‘본살풀이’와 태평무의 근원이 되는 ‘태평춤’을 독무로 추었다.
이 두개의 춤은 ‘우리 춤의 아버지’ 한성준(1874~1942)이 정리하여 손녀 한영숙(1920~1989, 승무 인간문화재)에게 전수한 것을 이애주가 유일하게 물려받은 것이다. 이 교수는 ‘태평춤’을 이날 LA에서 처음 발표한다고 말해 우리를 감격시켰는데, 참으로 특별하고 섬세한 공연이었다.
이어 제자들과 함께 춘 ‘승무’는 전통춤의 백미로 꼽는 이 춤의 진수를 보여준 화려하고 신비하며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날 무엇보다 우리 춤의 ‘기품’을 보게 돼 참으로 감사했다. 그동안 미주 한인사회에서 보아온 전통무용 공연무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현란하기 짝이 없는 원색의 의상이며 지나치게 진한 화장, 활짝 벌어진 미소, 이런 것들이 일체 배제된 우아한 모습이었다. 춤사위 자체가 품위 있고 아름다웠으며, 의상은 부드러운 색채와 과장 없는 디자인이 단아했다. 요란하지 않은 화장은 춤추는 이의 얼굴을 드러내 보여주었으며, 그들의 음전한 미소는 우리 춤의 원형이 얼마나 기품 있는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의 춤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실상 한국의 인간문화재들은 고령에 문화재 지정을 받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직접 추는 모습을 보기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승무(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인간문화재이며, 살풀이춤(중요 무형문화재 제97호) 전수자인 이애주 교수는 67세라는 나이를 느낄 수 없는 젊은 기와 혼과 열정으로 무대를 사로잡았으며, 공연을 끝낸 후에도 관객들과 질의응답을 가지며 미주 한인들의 뜨거운 관심에 호응했다.
사람들의 관심과 질문은 아무래도 1987년 이한열 장례식에서 시국춤을 추었던 일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는 “남북통일이 되는 날 다시 거리에 뛰어나와 춤판을 벌일 것”이라고 말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런 춤 공연은 생전 처음이고, 앞으로도 다시 있을 것 같지 않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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