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니미드는 런던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들판이다. 템스강물이 불어날 때마다 자주 범람을 해 ‘물에 젖은 들판’이란 뜻의 ‘러니미드’란 이름을 갖게 됐다. 지금은 한가한 시골에 불과하지만 800년 전인 1215년 6월 15일 이곳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해 ‘영주들의 동의 없이 함부로 세금을 걷지 않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 문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의 탄생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의 하나인 헨리 2세와 중세의 대표적 여걸 엘리노어 사이에서 다섯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존은 원래 왕재도 아니었고 순번도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한참 멀었다. 그러던 것이 첫째는 어려서 병으로 죽고 둘째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다 죽고 셋째는 말에서 떨어져 죽고 넷째는 자기 병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왕이 됐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부모가 물려준 프랑스의 앙주와 아키텐 등 광대한 영토를 모두 프랑스 왕에게 빼앗겼다. 이를 되찾겠다고 영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거둬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1214년 부빈에서 연합군인 독일 오토 황제의 군대가 프랑스 왕 필립에게 대패하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고 쫓겨 왔다.
거지가 돼 돌아온 존 왕에 대한 영국 국민과 영주들의 분노는 컸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신하가 왕을 몰아내고 권좌를 차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영주들은 앞으로는 왕이 영주들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세금을 걷고 사람을 잡아 가두는 길을 봉쇄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왕좌를 유지하는 타협안을 내놨고 존은 이 문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서에는 당시 상권을 쥐고 있던 런던 상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봉건 영주뿐만 아니라 ‘모든 자유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구절이 들어가 있었다. 이 구절은 훗날 영국의 법률가들에 의해 확대 해석돼 원래 영주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마그나 카르타가 모든 영국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존 왕이 이 문서에 도장을 찍은 후 다음 해 바로 죽은 뒤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던 마그나 카르타는 17세기 들어 찰스 1세가 다시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면서 반왕파의 구심점으로 떠오른다. 당대를 대표하는 법률가였던 에드워드 쿡은 마그나 카르타야 말로 앵글로 색슨 고유의 전통을 담은 법률 문서임을 주장하며 납세자의 동의 없는 과세의 부당성을 지적했고 이를 무시한 찰스 1세는 결국 도끼로 목이 잘리는 비운을 맞는다.
마그나 카르타는 고향인 영국보다 신대륙으로 이주한 식민지 주민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도 그럴 것이 17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 온 식민지 개척자들 중 상당수가 왕의 전횡에 신물이 나 아메리카에 영국 자유민의 권리가 보장받는 나라를 세워 보겠다는 사명감에 불타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영국 왕 조지 3세가 식민지 주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하자 이들이 ‘대표권 없는 과세 없다’를 외치며 미국 독립을 선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존 왕이 도장을 찍은 러니미드에 마그나 카르타 기념물을 세운 것도 영국인들이 아니라 미국 변호사 협회다.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한 연방 헌법 내 권리 장전과 유엔 인권 선언이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마하트마 간디부터 넬슨 만델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권 지도자들이 마그나 카르타의 이름으로 불의한 권력과 맞서 싸웠다.
현재 영국 국립 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그나 카르타 특별 전시회에 진열된 원본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글자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헝겊 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선조들은 이 문서에 의지해 국민의 기본권이 집권자의 자의에 의해 짓밟히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 냈다. 마그나 카르타가 없었다면 영국 민주주의도 없었고 영국 민주주의가 없었다면 미국 민주주의도 없었다. 미국 민주주의가 없었다면 한국도 민주 정부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6월 한 달 만이라도 마그나 카르타와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지켜낸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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