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LA에서 서울로 가는 항공기 안에서 우연히 ‘감기’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한국형 재난 블록버스터로 48시간 이내에 사망에 이르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발생해 통제 불능상태에 빠진 도시에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시스템은 그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실감나게 그렸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노스트라다무스 급 미래를 예측한 이 영화와 유사한 상황이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음에 아연해질 수밖에 없다. 연일 쏟아지는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관련 소식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 홍콩, 일본, 중동 국가에 이르기까지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는 가운데 “영화가 정말로 현실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보건당국이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던 메르스로 인해 대한민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일(한국시간) 메르스 사태 대응을 위해 오는 14∼18일로 예정된 미국 방문 연기를 전격 발표했을 정도이다. 사우디에 이어 한국이 메르스 감염국가 2위를 차지하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은 현 정부의 초기대응이 너무 안이하고 허술했던 때문이라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게 됐다. 영화 ‘감기’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일부 권력층이 독점하고 대중은 언론의 발표만 믿다가 혼란에 빠지는 모습이 현재와 흡사하다.
정부의 잘못은 차치하고라도 일반 시민들의 준법정신 실종도 질타 받아야 할 부분이다. 격리대상 의사 부부가 막무가내로 필리핀으로 출국했다가 돌아온 것이 나중에 파악됐고 자가 격리 대상인 서울 거주 50대 여성은 지난 2일 관할 보건소가 경찰에 위치추적을 의뢰해 전북 지역 골프장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남을 전염시킬 위험은 생각지 않고 나 혼자 편하면 된다는 편의주의와 이기주의적인 발상으로 실종된 시민의식은 무능한 정부 못지않게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부분으로 생각된다.
현재 중동의 아랍 에미리트가 한국 방문을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하고 나섰으며 홍콩 당국도 한국에 대해 홍색 여행경보를 발령함에 따라 만명 이상의 홍콩인 단체 관광이 취소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도 미국내 병원들에 “환자의 한국 방문 여부를 체크하라”는 경계령을 내리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 주류언론도 비중있게 보도할 정도로 한국의 메르스 사태는 국가적인 재난이 되고 있다.
메르스로 인해 한국 경제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메르스 확산으로 소비가 위축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관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중국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뚝 끊기고 대형 백화점, 고궁 등 인파로 붐비던 곳까지 인적이 드물어 내수에도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한국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된 LA 한인사회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여름방학이면 한국을 방문하는 유학생, 한인 2세 자녀, 외국인들이 한국방문을 꺼리면서 예약을 취소하는 사태가 빈발해 항공사, 여행사 등이 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를 너무 무서워할 것만도 아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메르스 두 번째 퇴원환자에 따르면 자신의 메르스 증상은 독감보다 크게 심하지 않았다며 이 바이러스에 대한 지나친 우려를 경계했다. 의사이기도 한 이 환자는 “기저질환이 없다면 메르스는 우리나라 의료진의 수준이 높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의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에서만 매년 2,000여명이 감기로 사망하고 폐렴으로 숨지는 사람은 3,000여 명에 달한다. 메르스가 현재 특효약이 없듯이 감기도 특효약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감기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의사들은 메르스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개인이 위생에 주의해서 잘 먹고 잘 쉬고 면역력을 높이면 걱정할 게 없다고 충고한다. 메르스를 과소평가해도 곤란하지만 과대평가해서 공포감에 짓눌린다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포 그 자체도 면역력을 약하게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본인의 면역력으로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웃으면서 마음 편히 지내는 것이 바이러스를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의사들은 권고한다.
미국을 2차 세계대전의 위기에서 건져 낸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언이 생각난다. “오직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peterpa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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