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지난 몇 호에 걸쳐 산업, 사회, 문화적 측면으로 본 미국의 역사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는 주축은 정치이고 미국정치의 중심은 대통령이다. 다시 정치얘기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필자는 그동안 “미국은 성공적인 나라가 될 숙명을 받은 나라이다”라는 것과 비슷한 언급을 이미 몇 번 반복하였다. 미국은 국가적위기가 닥쳐올 적마다 천행으로 국제정세가 미국에게 유리하도록 전개되었거나 아니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탁월한 대통령이 등장하였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 것은 확률적으로 보아 우연이라기보다는 미국의 타고난 숙명으로 보인다. 대개 정치적 신념이 확고하고 정치적 지도력이 탁월한 대통령들이었다.
그러나 남북 간의 경제적 대립과 노예제도문제로 나라의 분열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신념이 확고하고 지도력이 탁월한 사람”은 정치적인 발판을 마련하기가 점점 어려워가는 시기가 찾아왔다. 차라리 “색깔”이 분명치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덜 밉보이는 “무난한” “인물”들이 더 유리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노예문제에 대해서 태도가 애매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dark horse 라는 이유로 당선된 첫 번째 대통령이 제11대 James Polk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비슷한 이유로 선택된 두 번째 대통령이 제14대 Franklin Pierce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Polk 때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에 당선된 Pierce 는 Polk 보다는 강성대통령이었지만 그는 큰 업적도 없이 그의 퇴임 후 남북전쟁이 실질적으로 시작되도록 만들 정도로 국가분열의 강도가 심각해지도록 만든 사람이었다.
1852년의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이르러서는 정국은 Democrat 당과 Whig 당으로 갈려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 당 당내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렇게 어수선한 정국에서는 대선후보자들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 당에서도 후보자공천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해의 각 당의 대통령후보 선출과정을 보면 어느 정도나 혼란이 있었던 것이었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선 The Democrats 쪽을 보자. 여러 명의 후보자가 난립하여 출석대의원들 3분지2의 지지를 받는 후보자가 한명도 없이 투표가 33회나 공전하였다. 그때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New Hampshire 주 대의원들은 여러 가지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 색갈이 분명치 않았던 Franklin Pierce 의 후보공천이 가능한 것임을 알아차리고 34차 투표 때부터 Pierce 를 내세워서 각 파벌들과 꾸준한 타협과 흥정을 하였다.
Pierce 는 북부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정가에서 남부의원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전부터 노예해방주의자들 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제일 무난한 사람이 아니냐?” 라는 설득에 남부의 지지가 Pierce 에게 몰려서 드디어 48차의 투표에서 Pierce 가 대통령후보로써 공천을 받았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 라는 Gresham의 법칙이 미국정치에도 작용한 셈으로 “무능”이 “유능”을 정복한 것이다.
집권당이었던 Whig당 쪽은 더 궁지에 몰려 있었다. 처음에는 현대통령 Millard Fillmore가 유력할 듯이 보였으나 그의 친노예주의적 정책이 북부쪽 사람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어 52회나 투표를 했어도 후보자를 공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Whig당은 과거에 William Harrison (제9대, 1840)과 Zachary Taylor (제12대, 1848)등의 전쟁영웅을 후보로 내어놓아 대통령선거에 승리한 경험이 있었다.
결국 그 공식이 당면한 대통령선거에서도 통하리라고 생각되어 정치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버지니아주 출신 멕시코전쟁의 영웅 Winfield Scot 장군을 53차의 투표 때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러나 전쟁영웅공식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게 되었었다. 민주당의 Pierce후보는 상원의원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가 멕시코 전쟁이 나자 마흔두 살이나 된 사람이 이등병으로 입대한 후 군대경력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특명으로 준장에 임명되어 Scot 장군 밑에서 지휘관을 지냈었다. Pierce 도 “전쟁영웅”이었던 것이다.
1852년의 선거는 Pierce 후보의 압승으로 끝났다. 탁월한 웅변가였던 Pierce 가 승리한 선거가 아니고 연설을 전혀 할 줄 모르는 Scot 가 “패배한” 선거였었다고도 역사가들은 말하는데 Pierce 는 4주를 제외하고 전국을 휩쓸었으며 선거인단표 254표를 얻어 42표를 얻은 Scot 을 짓눌렀다. 그러나 두 후보가 다 친노예주의자들이었다고도 볼 수 있었던 까닭에 선거결과로 미국국민들의 노예문제에 대한 생각을 읽기는 어려웠다. 참고로 당시의 노예주와 비노예주의 분포는 막상막하로 아래와 같았다.
비노예주는 Maine, Vermont, New Hampshire, Massachusetts, Connecticut, Rhode Island, New York, Pennsylvania, New Jersey, Delaware, Ohio, Indiana, Illinois, Iowa, Michigan, Wisconsin, 현 Minnesota, 현Oklahoma 북부, 현 Washington, 현 Oregon, 현 California 등이었고,
노예주는 Maryland, Virginia, 현 West Virginia, Kentucky, Missouri, North Carolina, Tennessee, Arkansas, South Carolina, Georgia, Florida, Alabama, Mississippi, Louisiana, Texas, 현 Oklahoma 남부, 현 Utah, Nevada, Arizona, Colorado, Wyoming, New Mexico, 현 Kansas, 현 Nebraska 등이었다. 대통령들의 출신, 성격, 정치경력 등을 분석해보면 그들이 어떤 대통령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푸는데 다소 도움이 된다.
Pierce 는 후일 주지사를 지내는 New Hampshire 주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나 아마 일찍부터 부친의 후광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15세에 Bowdoin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공부보다는 사교생활에 더 열심을 하여 2학년 때에는 동급생중 맨 꼴지를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머리도 좋고 집중력도 강했던 사람이었던지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하자 졸업 때에는 4등을 하였다고 한다. 후일 Bowdoin 대학교의 총장의 딸 Jane Appleton 과 결혼을 했는데 부인은 매우 종교적 신앙심이 깊고 내성적인 사람으로서 Pierce 와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성격상의 차이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끝까지 순탄하지 못하였던 듯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변호사가 되었는데 24세에 뉴햄프셔 주하원의원이 되었고 2년 후인 26 세 때에는 주하원의장이 되었는데 그때에 그의 부친은 주지사를 하고 있었다. Pierce 부자는 앤드류 잭슨 (Old Hickory) 대통령을 열심히 지지하였던 탓에 Pierce는 Young Hickory 라는 별명을 얻었었다고 한다.
그는 29세 때에 뉴햄프셔 주의 연방하원의원이 되었다가 33세에 연방상원의원이 되어서 워싱턴으로 갔다. 당시에 연방 상하원의원들은 워싱턴에서 하숙생활을 하였었다는데 Pierce 는 이때에 남부출신의원 들과 친분이 많이 생겼으며 그것은 그의 후일 정치가로써의 행보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사교생활을 즐기는 성격에다가 혼자 생활하는 외로움도 겹쳐서 음주를 많이 하였고 그의 음주벽은 후일까지도 지속되었었다.
워싱턴에 따라온 부인 제인은 사람들을 사귀는 것이나 사교생활을 즐거워 하지 않아 워싱턴의 생활을 아주 싫어했었다고 한다.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었다는 부인이 워싱턴 생활을 도저히 더 할 수 없다고 하자 Pierce 는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4년 만에 연방상원 의원직을 사퇴하고 뉴햄프셔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민주당 정치생활을 열심히 계속하면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다. 그의 변호사업은 아주 성황 했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배심원 재판 때에 능숙한 언변으로 배심원들을 쉽게 감동시켜서 재판을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Pierce 는 성공적인 변호사업과 민주당 정치를 잘해 오던 중 1852년의 대통령후보공천 대회에 대의원으로 나갔다가 민주당의 후보공천이 난맥상을 겪게 되자 예상하지도 못했던´”무난한” 대통령후보로 “추대”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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