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다시 경찰의 공권력 남용에 항의하는 불길에 휩싸인 날, 미 사법당국의 총수가 바뀌었다. 이번 주 초 27일 미 최초의 흑인여성 법무장관 로레타 린치(55)가 취임선서를 하던 시간, 운전거리로 30분 떨어진 볼티모어에선 지난주 사망한 흑인청년 프레디 그레이의 장례식이 열리고 있었다. 경찰과 눈이 마주친 후 도주하다 체포된 지 1주일 만에 숨진 그는 척추의 80% 이상이 손상되고 성대가 망가진 참혹한 상태였다.
장례식이 끝난 후 분노한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폭력과 방화, 약탈이 난무하는 소요로 번진 볼티모어는 린치의 집무 첫날부터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몇 시간 뒤 축하자리여야 했을 신임장관의 백악관 첫 방문은 대통령에게 볼티모어 사태를 브리핑하는 업무회의가 되었고 취임 첫 날 장관의 공식일정은 “몰지각한 폭력시위”를 규탄하는 성명 발표까지 밤 9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린치의 상원 인준은 워싱턴의 정쟁으로 5개월 이상 지체되다가 지난주에야 이루어졌지만 첫 시험대는 취임과 동시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볼티모어 위기로 또 한 번 조명된 흑인에 대한 백인경찰의 끊이지 않는 과잉진압과 이로 인해 몇 달째 계속되는 전국적 소요를 진정시킬 린치 신임장관의 대응책을 전국이 주시할 것이다.
인종차별도, 경찰의 잔혹한 공권력 남용도 린치에겐 생소한 이슈가 아니다.
흑인노예의 후손으로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린치는 어린 시절부터 차별을 체험하며 자랐고 목사인 아버지의 민권운동을 지켜보며 정의구현의 신념을 다졌다.
초등학교 땐 흑인아이의 표준고사 성적이 너무 좋아 의심스럽다는 교사에 의해 재시험을 강요당했고 고교 땐 최우수졸업생의 영예를 차점자인 백인학생들과 공유해야 했다. 재시험 성적은 더 높았고 편견을 극복하며 한층 단단해진 흑인 소녀는 하버드 대학과 하버드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종종 법정 속기사로 오인 받은 변호사시절을 거쳐 1990년부터 연방검사로 재직하며 마약, 조직범죄, 공직자 부패등 터프한 사건들을 빈틈없이 처리하면서도 늘 자세를 낮추었던 린치가 검사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97년 뉴욕경찰의 흑인 용의자에 대한 야만적인 폭력사건을 통해서였다. 거리소요로 체포된 아이티 이민청년 애브너 루이마에 대한 잔인한 성고문 등 폭력혐의로 4명의 백인경찰들을 기소한 린치는 당시 기세등등했던 뉴욕경찰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성고문 가해자인 저스틴 볼페에 대해 30년형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경찰의 목조르기 진압으로 사망한 흑인 에릭 가너 사건도 린치가 지난주까지 뉴욕 동부지구 연방검사장을 역임하면서 다룬 케이스중 하나였다. 에릭 가너, 달아나다 경찰에게 총격 살해당한 월터 스콧, 그리고 이번 프레디 그레이 사건까지 법무부가 이미 조사에 착수했으니 최근의 과잉 공권력 케이스는 모두 린치의 지휘 아래 마무리될 것이다.
새 법무장관 린치가 처리해야할 이슈는 테러에서 사이버 안보, 마리화나 합법화에서 대 의회 관계개선에 이르기까지 산더미이지만 최우선 과제는 백인경찰과 흑인 커뮤니티의 관계 개선이다. 지난여름부터 그처럼 많은 피를 흘리고, 그처럼 많은 분노가 전국을 뒤덮었어도 경찰의 공권력 남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도망가는 흑인을 뒤에서 쏘아 죽이고, 체포한 흑인을 구타해 죽이고…아직 상당수의 경찰국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법과 법 집행자에 대한 신뢰 회복”을 린치 자신도 상원 청문회와 취임사에서 시급한 과제로 꼽긴 했지만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임기가 짧다. 1년 반이 조금 넘는 시간에 해결하기엔 수백년 누적된 차별과 빈곤에 근거한 너무 복잡한 과제다. 전임 에릭 홀더장관 시절 경찰 커뮤니티로부터 ‘반 경찰’로 낙인찍힌 행정부의 이미지도 극복해야할 장애이며 지역정부 소관인 경찰의 공권력 남용문제를 해결할 도구도 많지는 않다.
지역경찰들을 위한 법무부의 ‘커뮤니티 지향 경찰서비스’라는 소프트 정책은 이번 말썽 난 볼티모어 경찰국도 참여했었다니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공권력 남용 경찰에 대한 민권침해 소송제기와 해당 경찰국에 대한 연방예산 보류 등이 그나마 법무부가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그가 이 ‘무기’를 얼마나 단호하게 사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인준안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일부 공화당 의원들도 린치를 그중 ‘적임자’로 인정은 하고 있다. 흑인으로 겪은 인종차별 못지않게 매일 범죄와 마주하는 일선 검사로 치안업무가 얼마나 힘든지도 체험한 린치가 민권운동가들의 기대뿐 아니라 경찰·검찰 등 치안담당자들의 신뢰도 동시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편견에 시달렸으면서도 감정 아닌 이성으로 추진하는 빈틈없는 일처리와 ‘강철과 벨벳의 조합’이라고 표현되는 성품, 비정치적 성향으로 폭넓게 존경받는 리더인 그는 취임사에서 법무부 동료들에게 “법을 단순히 대변하고 집행하는데서 그치지 말고 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위한 공정과 평등의 약속, 자유와 정의의 약속을 실현시키자”고 호소했다.
법무부(Dept. of Justice)의 이름처럼 정의(Justice)를 “우리의 나침반”으로 삼겠다는 그의 약속이 실행된다면 이번 여름은 지난여름보다 훨씬 평화로워질 것이다. 4.29 폭동을 겪은 이후 백인경찰과 흑인커뮤니티가 충돌할 때마다 되살아나는 악몽에 시달리는 우리들의 일상도 한결 안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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