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대통령도 아니면서 힐러리 클린턴만큼 강력한 입지에서 출발했던 대선 후보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12일 출마를 공식발표한 그가 민주당 경선에서 뿐 아니라 2016년 11월 본선에서도 막강후보라는 사실은 ‘힐러리 타도’에 일제히 포문을 연 공화당도, 그의 중도적 이념에 저항하는 민주당 내 리버럴도, 좋든 싫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힐러리가 ‘필연적(inevitable)’ 후보로 지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치 신인 버락 오바마에게 무너졌던 2008년 첫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을 때도 힐러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적의 ‘필연적’ 후보였다. 당시의 충격적 패배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의 결과로 힐러리의 지금은 그때와는 출발부터 확연히 달랐다.
그때 “난 승리하기 위해 출마한다”고 선언하며 거창한 공약들을 제시했던 힐러리가 지금은 “나, 힐러리”를 내세우지 않고 힘겹게 버티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대변자가 되고 싶다”면서 “여러분의 표를 얻으러 길을 나선다”고 지지를 구한다. 화려한 팡파레도, 값비싼 전세기도 없이 미니밴을 타고 그때의 패배지 아이오와를 찾아 간 ‘엘리트’ 힐러리의 소박한 ‘대중 속으로’ 유세는 일단 성공적인 듯하다. 그 지역 민주당 관계자의 82%가 만족을 표했고 상당수 공화당 관계자들도 ‘효과적 캠페인’으로 인정했다고 엊그제 실시한 폴리티코 여론조사가 전하고 있다.
자만했던 그때와는 달리 “그 어떤 것도 당연시 하지 않을 것”이라며 막상막하 경선인 듯 치열한 유세를 다짐하고 있긴 하지만 힐러리의 이번 경선 승리는 거의 확실하다. 이미 부통령 후보가 거론될 정도다.
민주당이 그의 불출마를 두려워했을 만큼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의 오바마는 출발부터 준비된 후보였다. 후보 개인의 카리스마 뿐 아니라 캠페인 팀의 승리전략도 빈틈없었고 출마선언 무렵엔 상당한 당내지지도 확보한 상태였다. 지금은 그 같은 조직과 자금을 갖춘 다크호스가 새롭게 등장하기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다.
‘확실한 승리’ 예상은 민주당 경선까지다. 본선은 다르다. 4년 전보다 많이 강해진 후보들의 난타전에서 살아남은 공화당 후보와 겨룰 싸움에서 힐러리는 더 이상 ‘필연적’ 후보가 될 수 없다. 전례 드문 강력한 후보답게 강점은 여전히 빛을 발하겠지만 발목 잡는 약점도 속속 노출되며 명암이 교차할 것이다. 최근의 이메일과 클린턴재단 기부금 논란에서부터 퍼스트레이디시절 불거졌던 화이트워터, 트래블게이트와 국무장관시절 벵가지 사태에 이르기까지 온갖 스캔들에 휘말리는 동안 하락한 신뢰도 문제, ‘클린턴’이라는 이름이 주는 피로감 등은 캠페인 내내 따라 다닐 것이다. 남편 빌 클린턴이나 오바마와 달리 힐러리는 카리스마와 웅변으로 유권자를 사로잡으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선천적 정치가도 못된다.
더 큰 약점은 힐러리 자신의 권한 밖에 있다. 정치환경과 나이다. 2016년 대선의 기류는 공화당에 유리하다. ‘오바마 3기’를 원치 않는 유권자들이 변화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힐러리 아닌 누구라도 2016년 민주당 후보가 감수해야할 부담이다. 경기회복과 헬스케어 개혁을 이룬 오바마의 업적을 자산으로 삼으면서도 소득 불평등의 해소와 국가의 안보강화를 약속하는 거리두기로 균형을 잘 잡지 못하면 오바마 표밭과 무소속 표밭 모두를 잃을 수 있다.
누가되든 공화당 후보는 힐러리 보다 젊을 것이다. 레이건이 당선되었을 때와 같은 69세이지만 이미 공화당에선 힐러리를 ‘어제의 리더’로 몰아가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노인층의 투표 참여 증가 등 강점으로 반전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반세기 동안 퍼스트레이디에서 상원의원, 국무장관까지 뉴스의 조명 속에 쌓아온 화려한 경력과 세월은 스캔들과 고령이라는 약점의 근원도 되었지만 공화당 어느 후보도 근접하지 못할 경험과 관록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유권자가 ‘새로운 변화’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로운 안정’을 원하는 말 없는 다수도 있다.
본선의 선거인단 지도는 수학적으로 민주당에 유리하다. 뉴욕타임스 분석에 의하면 1992년 이후 대선마다 민주당이 승리한 18개주와 워싱턴 DC의 선거인단을 합하면 242명이다. 당선권인 270명에서 28명만 부족하다. 10여개 접전 지역 중 플로리다 하나에서만 더 승리해도 “제45대 힐러리 로댐 클린턴 대통령”은 역사에 기록된다.
대선 후보 힐러리의 최대 강점은 여성표밭이다. ‘첫 여성대통령’을 기다려온 다양한 연령과 인종의 여성들이 힐러리의 ‘충실한 보병’이 될 것이다. 소수계와 젊은 층의 ‘오바마 연합’이 그의 보병이 되었듯이.
이제 첫발을 내딛은 백악관으로의 여정이 쉽지 않다는 것은 힐러리 자신부터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본선까지는 19개월이나 남았고 어떤 변수가 선거판을 어떻게 흔들어 댈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힐러리가 그저 이미지 쇄신에 그치지 않고 ‘보통 미국인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한 구체적 어젠다를 제시하며 지난 두 번의 민주당 승리를 가져온 ‘오바마 연합’과 자신의 ‘여성 표밭’을 효과적으로 결집할 수 있다면 우린 또 한 번의 새 역사 창조에 동참하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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