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대선에 출마한 랜드 폴에게 가장 큰 자산이자 가장 큰 부담은 ‘아버지의 그늘’일 것이다. 사반세기 동안 연방하원의원을 역임하며 3번이나 대선에 출마했던 아버지 론 폴의 유산(legacy)은 그에겐 ‘힘의 원천’인 동시에 ‘우려의 원인’이기도 하다.
골수 자유주의자들(Libertarian)의 열렬한 지지를 기반으로 아버지가 구축해놓은 모금과 자원봉사 네트워크는 대부분 후보들이 갖지 못한 든든한 조직이지만 강력한 자유주의 리더인 아버지가 주창해온 극단적 고립주의 시각은 국제정세 불안한 2016년의 공화당 대선후보를 노리는 그에겐 최대의 약점이 되고 있다.
켄터키 주 초선 연방 상원의원인 랜드 폴은 텍사스에 살던 11세 때부터 아버지 캠페인을 도와 가가호호 방문하며 정치를 익혔다. 21세 대학생 때 상원에 도전한 아버지의 대리 연사로 포럼에 참석, 현역 필 그램 상원의원에 맞서며 그에게서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러워 할 아들”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고, 2008년 아버지의 대선 출마 때는 “군수산업에 백지수표를 써준” 공화당 기득권층을 맹비난하며 “론 폴의 혁명”을 외치기도 했다.
당시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미군의 해외개입 위험성을 경고하며 청중의 환호를 이끌어냈던 40대 안과의사 랜드 폴은 이제 스포츠자켓을 입고 훨씬 주류같은 어조로 “미국의 이익 보호를 위해 ‘힘을 통한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52세 공화당 대선후보로 진화했다.
티파티의 물결을 타고 2010년 상원에 입성한 후 오래지 않아 대선출마를 꿈꾸면서부터 폴은 아버지와는 다른 독자적 이미지 만들기를 시도했다. 덜 극단적인 자유주의, 덜 극단적인 고립주의, 덜 극단적인 반주류… 유권자들에게 ‘보다 마음에 드는 폴’이 되려는 노력이었다고 월스트릿 저널은 전한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정치를 배우며 성장한 그에게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골수 자유주의와의 거리두기는 자칫 충성스런 표밭과 소원해지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자유주의 진영을 유지하면서 주류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새로운 표밭을 계속 확대해야 하는데… ‘보수적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며 ‘공화당 주류로 다가가는 자유주의’ 브랜드를 조심스럽게 다듬어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게다가 타이밍도 그에게 별로 우호적이 아니다. 미전체가 전쟁피로증후군에 시달리는 가운데 기능마비 상태에 빠진 큰 정부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지난 몇년이었다면 폴의 후보 입지는 훨씬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인이 중동의 테러집단에 참수형을 당하는 원색적 장면의 충격으로 일반 국민들도 국제위기에 민감해지고 있는데다 티파티 물결 역시 상당히 가라앉았다. 반전·반정부의 자유주의 성향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더욱 낮아진 것이다.
사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랜드 폴에 대한 인기와 관심은 상당했다. 국가정보원의 무차별 정보수집에 맞서 프라이버시 보호를 주창하며 밀레니엄 세대를 사로잡았고 흑인대학과 도심 빈곤지역을 방문하며 공화 예비후보로는 드물게 마이너리티 아웃리치를 시도했다. 평소 공화당을 외면해온 젊은 층과 소수계 유권자를 공략하는 공화당 표밭 확대 노력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화두는 국제정세다. 국가안보가 일반 국민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고 국방 외교정책에선 강경매파의 보이스가 다시 커졌다. 이제와 입장을 바꿔 국방예산 인상을 제안하고 이슬람국가(IS) 공습작전이나 이스라엘 군사원조를 지지한다 해도 국방에 강경해야하는 공화당 후보로서의 폴의 입지는 궁색하지 않을 수 없다.
랜드 폴은 이틀 전 “좀 다른 공화당”으로 “워싱턴 제도권을 물리치고 아메리칸 드림을 되살리겠다”고 약속하며 대선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국가정보원의 무차별 개인정보 수집 중단을 약속한 그의 출정식엔 흑인과 라티노, 젊은 대학생들이 연단에 올라 다양한 인종, 다양한 계층이 손을 잡는 ‘랜드 폴의 무지개 연합’을 상징했다. (아버지 론 폴은 참석은 했지만 마이크를 잡지는 않았다.)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표밭과 조직, 소수계와 젊은 유권자에 어필하는 아웃리치가 후보 랜드 폴의 강점이라면, 소극적인 외교정책과 이를 만회하려는 입장변경, 행정경험 결핍과 미디어와의 까칠한 관계는 곳곳에서 그의 발목을 잡을 약점들이다.
공화전략가 매튜 다우드가 비유하는 약점도 있다: “유권자들이 그가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는데, 랜드 폴은 아직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의 승리를 점치기엔 자유주의 표밭이 너무 적고 아버지의 그늘이 너무 짙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전망이지만 아주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특히 아이오와와 뉴햄프셔 등 초기 경선지역에서 승리할 경우 폴은 초만원 공화 대선필드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폴이 공화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사실 희박하다. 그러나 그의 출마가 장기적으로 공화당의 미래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정치학자들은 지적한다. 공화당과 서로 외면해온 소수계와 젊은 층을 끌어안으려는 그의 열정이 공화당의 탈바꿈을 촉구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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