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도 싱그러운 날들은 있었을 것이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에게 테러를 가하고 종로경찰서에 끌려와 콘크리트 바닥에 드러누워 울부짖는 김기종(55)씨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젊고 푸르른 날들, 내 한 몸보다는 민족과 역사를 위해 뭔가 뜻있는 일을 하겠다며 희망에 들뜬 날들이 그에게 있었을 것이다.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서 그는 돌아갈 수 없는 아득한 저편의 날들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생각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80년대 중반 그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의식있는 청년이었던 것 같다. “역사 단절을 문화로 극복하겠다”며 탈춤, 판소리 등을 보급하는 전통문화 활동에 나섰다. 그리고는 ‘민족’과 ‘통일’ 관련 활동들을 이어간 것 같은데, 그렇게 30년을 보낸 지금 그의 모습은 참담하다. 폭력적 돌출행동을 일삼는 외톨이 과격분자, 몇십만원 월세를 감당 못하는 기초생활수급자, 누구도 곁에 없는 미혼의 50대로 요약된다.
“사회가 알아주지 않으니 자꾸 과격한 방법을 택하는 것 같다”는 동생의 말, “피해의식이 강해 삐딱한 질문과 욕설로 공청회를 망치곤 했다”는 한 국회의원의 말, “폭력적이고 우발적 행동들로 물의를 빚어서 다른 활동가들과 멀어졌다”는 지인의 말은 청와대 앞 분신자살 기도, 주한 일본대사에 콘크리트 투척, 리퍼트 대사 공격 등 사건들과 관련한 그의 심리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그가 극도로 과격한 행동을 보인 것은 나이 50즈음부터였다. 젊은 날 꿈꾸었을 이상적 자신과 실제 자신 사이의 크나큰 괴리, 이를 사회의 부조리와 몰이해 탓으로 돌리고 싶은 심리, 거기에 나이가 주는 초조감이 뒤섞이면서 좌절과 절망감이 그를 극한 행동으로 내몬 것 같다.
스스로 원하는 자신과 실제 자신 사이에서 갈등이 없는 사람은 복되다. 행복의 비결은 많이 갖는 것보다 이미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는 생각이다. 스스로에 대해 ‘이만하면 괜찮다’ 싶은 만족감, 존재에 대한 자긍심이 물질 즉 소유보다 행복에 더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 같다.
자신에 대한 만족감은 몇 가지 경로로 얻어진다. 일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성취감을 느낄 때, 가족과 친지들에게서 사랑받고 인정받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느낄 때, 그리고 신앙인들의 경우 절대자에 순종하는 겸허한 자세를 가질 때 자족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상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진다. 화해는 마음의 평안, 행복으로 이어진다.
‘신앙, 가족, 공동체, 일’은 행복의 요인들 중 우리가 통제 가능한 4개 기본요소에 해당한다. ‘행복’에 대한 가장 포괄적 연구로는 시카고 대학이 지난 1972년부터 전국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해온 총괄적 사회 조사(GSS)가 꼽힌다. 40여년에 걸친 이 조사 결과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 요인은 유전자로 드러났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 있는 것은 유전적 기질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행복감의 48%를 좌우한다니 유전자의 힘은 막강하다.
다음 중요한 요인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 행복감의 40%를 좌우하는 것은 기분 좋은 사건들이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거나, 아이가 명문대학에 합격하거나, 승진을 하거나, 로토에 당첨되는 등의 기쁜 일들로 인해 우리는 행복해진다. 하지만 이런 외적 일들로 인한 행복감은 영구적이지 않고 얼마 지나면 시들해지는 것이 문제이다.
유전자도,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나머지 12%. 그것이 가족과의 긴밀한 관계, 공동체 결속감, 일을 통한 성취감, 그리고 신앙이 주는 힘이라고 GSS는 분석한다.
이런 분석은 중미의 파나마가 세계에서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힌 지난해 관련조사 결과를 뒷받침해준다. 파나마는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국내총생산 세계 88위, 빈민층이 전체 인구의 26~28%에 달하는 가난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삶에 만족하며 행복해 한다. 타고난 성향이 여유롭고 낙천적인 것이 큰 요인이고, 가족은 물론 이웃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생활방식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으로 분석된다.
개개인이 행복해야 행복한 사회가 되는 데, 요즘 한국에서는 불행한 사건들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리퍼트 대사 공격사건은 한 외톨이 과격분자의 잘못된 자화상, 스스로를 민족주의 영웅으로 각인하고 싶은, 그렇게 세상에 알리고 싶은 허망한 아집이 빚어낸 사건으로 보인다. 스스로와 화해할 수 없는 불행이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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