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미국의 산업혁명사례 두어 가지를 더 얘기해 보고자 한다. 두 얘기가 다 Eli Whitney 라는 재주꾼에 대한 것인데 그는 훗날의 포드, 카네기나 에디슨처럼 대기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간단해 보이던 발명들은 미국의 산업혁명과 역사의 방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농담 중에 “Watch what you are wishing for!” 라는 표현이 있다. 가난에 한이 맺힌 사람이 “제발 제 손 닿는 것마다 금이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한 소원이 성취됐다던 지, 아니면 몇 번의 구애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거절을 당한 추남 노총각이 홧김에 “이 세상 처녀들이 모두 저를 보면 사족을 못 쓰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던 것이 응답되었다고 한 번 상상해보자. 몇 분 가지 않고도 “제발 원상복귀 좀 시켜주십시오” 라면서 애원했을 것이다. 종교인들이 항상 길게 내다보고 소원성취 기도를 하여야하는 이유이다.
전쟁 중 고의적으로 대량 살상을 위해 원자탄을 만들어 쓰다보니까 방사선치료, 원자력발전은 평화적인 용도도 알게 되었지만 신속한 수송의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비행기가 이제는 가공할 인류파멸의 흉기로도 변질되어 있다. 과학자들과 발명가들 중에는 “내가 발명한 것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쓰여 지느냐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 라든가 상관하지 않는다” 는 얼핏 듣기에 철학적인 것 같은 반응을 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된다. 대재벌들이 없으면 현대의 사회나 경제가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반문도 있겠지만 실은 없어졌으면 싶은 대소 재벌들도 많이 있다. 모든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게 마련이지만 Eli Whitney라는 사람도 자기가 미국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 알지는 못하고 떠났을 것이다.
Whitney는 매사추세츠 주의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가 열한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가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계모가 반대하자 그는 교편 등을 잡아서 학비를 저축한 후 예일대학을 자력으로 졸업하였다. 그 당시 남부의 농장주들은 자녀들을 북부의 대학교들에 유학시키거나 아니면 명문대학졸업자를 가정교사로 채용하여 농장에서 거주하며 자녀들을 교육하도록 하였다.
Whitney도 조지아에서 독립전쟁영웅 Green 장군의 미망인이 경영하는 대농장에 가정교사로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남부 대농장들은 노예들을 사용하여 쌀, 담배, 사탕수수, 물감의 원료인 indigo와 면화를 집중적으로 생산하여 북부와 유럽에 수출하였다. 그중 면화는 가장 수요가 많고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농산물이었으나 너무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작물이었다. 임금이라야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이 전부이었던 값싼 노예들을 썼지만 항상 손이 모자랐고 타산이 맞지 않았다.
면화를 수확한 후 면화씨를 빼어내야만 팔 수 있는 상품이 되는데 일일이 씨를 손으로 떼어내는 작업이 엄청나게 힘이 들어서 하루에 노예 일인당 씨를 빼낸 솜 반 파운드 정도밖에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수준의 생산력으로는 아무리 노예 같은 싼 노동력을 쓰더라도 타산을 맞추기가 어려워서 면화농사는 점점 사라져 가는 농업이 되어 가고 있었고 노예제도가 자연히 소멸될 가능성마저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Whitney가 Green장군 미망인의 대농장에 그 집 아들의 가정교사로 갔었다. Whitney는 평소 관찰력이 많았던 사람이었던 모양으로 한 십여 일 간 노예들이 면화씨를 손으로 떼어내는 일을 하는 것을 보고난 후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던 중에 농장주 Green장군의 부인으로 부터 좋은 방법을 연구해 보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Whitney는 얼마간의 연구 끝에 면화씨를 제거하는 간단한 기계를 1793년에 발명하고 이 기계를 ‘Engine’이란 단어에서 gin 을 떼어내 ‘Cotton Gin’이라 이름 붙였다. 노예 한명이 하루 걸려서야 반 파운드의 완제품 솜을 만들어 내던 것을 이 Cotton Gin 한대가 하루에 55 파운드의 완제품 솜을 생산하였으니 이 기계는 가히 혁명적인 발명이었다. Cotton Gin의 발명으로 1793년에는 미국의 솜 수출양이 50만 파운드이던 것이 1810년 에는 9천3백만 파운드까지로 늘어나 미국 총 수출액수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고 남부 에서 Cotton Is King!‘ 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Cotton Gin의 발명은 미국역사의 방향도 돌려놓았다. 노예농업이 타산이 맞지 않아 농업과 노예제도가 시들어져 가고 있다가 Cotton Gin의 발명으로 농업수지가 맞게 되자 노예제도가 부활되고 다시 왕성해지기 시작하면서 “노예제도는 죄악이 아니고 아주 좋은 제도이다” 라는 주장이 남부에서 강하게 일어났으며 남북의 분열이 점점 더 심각해지다가 결국은 미국의 비극인 남북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한다. Cotton Gin 때문에 남북전쟁이 났다는 논리는 아니지만 Whitney가 상상도 못했던 결과가 나온 것이다.
Whitney 는 여우가 닭을 닭장 울타리의 좁은 간격으로 억지로 빼내는 과정에서 닭털들이모두 빠지고 살만 틈사이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Cotton Gin의 영감을 얻었다 고도 하는데 “왜 내가 그 간단한 아이디어를 먼저 생각해내지 못했을꼬. 하고 가슴을 치던 사람들이 Cotton Gin의 idea 는 Green 장군의 미망인이 준 것이라는 등 Whitney를 애써 깎아내리려고 하였다고도 한다.
Whitney는 그의 발명의 역사적 중요성으로 보아 당연히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가 되었어야한다. 그러나 그는 기업인으로서의 재능이 없었고 시대를 잘 못 맞나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첫째로 당시의 특허제도가 아주 허술한 것이어서 1794년에 특허는 내어주었지만 특허보호에 필요한 validation은 1807년에야 나왔다고 한다. 둘째로 Miller라는 동업자와 함께 Cotton Gin을 생산하기 시작한 Whitney는 기계를 팔지 않고 사용자가 완제품 솜 값의 40%의 사용료를 계속 내도록 지나친 요구를 하였고 또 Cotton Gin이 너무 간단한 것이라서 모조품들이 싼값으로 판을 쳤으며 특허청의 무능으로 특허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1794년부터 생산을 시작한 Cotton Gin 회사는 계속 되는 특허권재판의 비용을 다 감당할 수가 없어서 1797년에는 파산으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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