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서화가 바스키야·액션페인팅 폴락 영향 받아
▶ 무표정의 매력에 주목… 작품성 떠나 즐겼으면”
하정우.
[LA서 첫 개인전 ‘배우화가’ - 하정우]
하정우가 ‘참 괜찮은 배우’이고 ‘꽤 괜찮은 화가’인 줄은 알았지만 ‘정말 괜찮은 인간’임을 알게 된 건 기분 좋은 수확이다. 스크린에서 볼 때보다 훨씬 듬직한 체격, 안정된 눈빛, 진지한 태도는 탑스타 포스에 일종의 방어기제를 갖고 있는 기자를 순식간에 무장 해제시켰다. 40여분 인터뷰하는 동안 그는 내내 성실하고 겸손한 답변으로 마주 앉은 사람에게 집중했다. 나이(37)에 비해 내공이 많이 쌓인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는데, 설마 그것도 연기였을까?
하정우(본명 김성훈)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지난해 LA 아트쇼에서였다. 표 갤러리가 들고 나왔는데 처음엔 그다지 흥미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작품 자체보다 영화배우가 그렸다는 선입견이 감상을 먼저 지배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본 듯한 형태, 지나치게 뚜렷한 선과 원색들, 선을 많이 만들면서 기하학적으로 쪼개고 더하여 큰 형태를 채워가는 그의 그림은 추상도 구상도 전통회화도 팝아트도 아닌, 낙서 비슷하게도 보이지만 낙서라기엔 너무 깔끔하고 시간이 많이 들어간, 요즘 현대회화의 경향과는 많이 다른 어떤 것이다. 사실 하정우의 그림들을 확실하고 자세하게 본 건 이날 표 갤러리에서였는데, 섣부른 판단과 비평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7~8년 전 인사동에서 열린 한 그룹전에서 작가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작은 작품을 샀던 것이 계기가 돼 하정우를 발굴했다”는 표미선 표 갤러리 대표는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모든 것이 내재돼 있는 풍부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이디 장 표 갤러리 LA의 디렉터는 “하정우의 작품에는 요즘 현대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창성이 있다”고 말하고 “그가 스타인지 모르는 외국인 고객들도 작품성에 찬사를 보내고 있으며, LA 카운티미술관의 마이클 고반 관장과 마이클 차우 이사가 작품을 보러 오겠다고 연락해 왔을 정도로 주류 화단에서도 주목을 끌고 있다”고 전했다.
하정우는 “LA 교민들의 관심이 너무 고맙고, 나의 그림이 한인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며 “깊이와 작품성을 다 떠나서 사람들이 많이 와서 보고 즐겼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포즈’(Pause)란 제목의 이 전시회는 4월18일까지 계속된다.
PYO Gallery LA, 1100 S. Hope St. #105 LA
- LA에서 첫 개인전인데 소감이 어떤지요?
▲ 작년과 올해 LA 아트쇼에 나갔을 때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셔서 한 번 제대로 작품들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2월 초에 ‘암살’ 촬영이 끝나고는 바로 LA로 날아와 작업했어요. 여기서 집중력 있게 그린 그림들이 여러 점 걸려 있습니다.
- 하정우 개인전 한다니까 굉장히 관심들이 많습니다. 일부에선 예술성에 대한 왈가왈부도 있는데 지나친 관심과 화제가 부담스럽지 않은지요?
▲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런 시선이나 이야기들, 앞으로 10년, 20년 뒤에는 저의 마음과 열정이 증명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영화와 그림을 통해 증명해 나가는 거지요.
- 촬영지에서도 그린다고 하는데 캔버스 대작을 어떻게 들고 다닙니까?
▲ 캔버스 천을 둘둘 말아서 들고 갑니다. 물감은 현지에서 사기도 하고, 제 주머니에는 항상 마커가 들어 있지요(인터뷰 도중 허리에 차고 있던 백에서 한 움큼의 마커를 꺼내 보여준다). 호텔방 벽에 천을 붙여놓고 그려요. 일년이면 반 이상을 해외에서 지내다보니 낯선 환경에 빨리 적응하려면 체류공간을 집처럼 만들어야 하는데, 그림이 가장 많이 안정감을 줍니다.
- 촬영 중 어디서 그림을 그렸나요?
▲ ‘베를린’ 찍을 때 갔던 베를린과 라트비아, ‘허삼관’을 찍었던 상하이, 그리고 휴가차 갔던 하와이에서 작품이 많이 나왔습니다. 해외에서 그린 건 그림에 도시 이름이 적혀 있어요.
- 사람 얼굴이 많습니다.
▲ 영화를 찍고 만들고 하다 보니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에요. 특별히 무표정의 매력에 주목합니다. 사람이 멍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무표정은 가장 자연스런 순간이고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죠. 학습을 통해 만들어진, 표정을 ‘짓는’ 얼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림 공부를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나요.
▲ 10년도 넘었네요. 20대 중반이었는데 앞날이 불안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취업 보장도 없고… 배우는 특히 그래요. 선택 받아야만 일할 수 있는 직업이거든요. 그런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어느 날 문방구에 들어가 스케치북과 4B 연필, 수채화 물감을 사다가 그냥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드로잉 기술에 한계를 느끼게 됐죠. 그리고 싶은데 표현이 잘 안 되고 그러니까. 그래서 다른 작가들의 화집도 보고, 화가 다큐영화 같은 걸 보기도 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야와 잭슨 폴락의 영향을 좀 받았죠.
- 낙서화가 바스키야의 영향은 보이는데, 액션 페인팅의 폴락에게서는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 무의식의 흐름이죠. 있는 그대로 나오는 거. 저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잘 그려야겠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내가 그릴 수 있는 걸 내 손맛으로 그리면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솔직하게 그리는 것이 회화의 큰 힘이니까요.
- 그림을 시작한 후 연기가 달라졌는지, 삶이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 연기는 사실 꾸며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린 후부터 내 민낯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민낯을 연기에 담아내게 됐습니다. 사람들은 단점을 가리기에 급급하지만, 장점에 좀 더 집중하고 키워나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또 어떻게 넓은 그릇과 깊이 있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건 종교적인 것이기도 하죠.
- 기독교인이군요. 그림에 십자가가 많이 보이네요.
▲ 기독교 신앙은 가장 큰 힘이고 큰 버팀목입니다. 십자가, 물고기, 동그라미의 반복 패턴을 계속 그릴 때 명상하듯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합니다.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란 제목을 붙인 저 십자가는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을 그린 겁니다.
- 지금까지 몇 점이나 그렸는지 셀 수 있습니까?
▲ 정확히는 모르지만 수백점이 넘고 거의 다 팔렸습니다. 발표한 적이 없는 아주 초기작 10점만 제가 가지고 있어요.
- 작품가격은 얼마나 되나요? 팔아서 번 돈으로 뭘 하세요?
▲ 가격은 갤러리에 물어보시구요(화랑에 따르면 3,000~3만달러), 작품 팔아서 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신인 작가라 그런지 이거 떼고 저거 떼면 남는 게 별로 없어요. 지난해에 뉴욕 전시에서 다 팔렸다고 했는데도 운송비에 보험료 등등 해서 정말 깜짝 놀라게 적은 돈을 받았어요. 표갤러리와 카르티에 전시했을 때는 수익금을 제가 후원하는 단체에 도네이션 했고… 그림으로 돈 번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 올해 영화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 6월 초에 ‘아가씨’(박찬욱 감독) 촬영 시작하구요, 7월에 ‘암살’(최동훈 감독) 개봉, 연말에는 ‘신과 함께’(김용화 감독) 촬영이 시작됩니다.
- 직접 감독한 ‘허삼관’이 흥행에 실패했는데 감독 다시 할 건지요?
▲ 계속할 겁니다. 여러 가지를 구상 중이고 3년 후쯤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 이번에 LA에 꽤 오래 머무네요.
▲ 이달 중순에 돌아갑니다. 전에 잠깐씩 왔을 때는 몰랐는데 이번에 보니 LA는 나무가 별로 없네요. 특히 한인타운이 삭막해요. 나무심기 운동 같은 걸 벌일 수는 없을까요? 이번 전시회 수익금으로 나무 한 그루 심어놓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씨앗이 돼서 10~20년 뒤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앞으로는 1년에 한 번씩 여기서 전시회를 갖고 교민들과 만나 살아가는 얘기도 하고 그러면 좋겠습니다. 한인타운이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숙희 기자>
■ 하정우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아버지(탤런트 김용건)가 그림 컬렉션하는 걸 보며 성장한 그는 2003년 직접 그리기 시작했고, 영화 촬영하는 일 외에는 언제나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웬만한 작가들보다 작업량이 많은 그는 2010년 첫 개인전을 가진 후 지금까지 8회의 개인전과 수많은 국제미술제에 참여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오는 5월 뉴욕에서 개인전이 있고, 7월엔 광주시립미술관의 초대도 받았다. 2011년 에세이집 ‘하정우, 느낌 있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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