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기독교영향권 하에 있는 서양 대부분의(요즈음은 원래 기독교 영향권아래 속하지 않았던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까지 포함해서) 나라에서 2월14일을 Valentine’s Day 라고 부르면서 대게 연인들 사이에 Valentine’s Day card와 달콤한 heart 모양의 초콜릿과자를 교환한다.
“대게”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Valentine’s Day 때의 “연애” 관계는 “짝사랑”도 포함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아서이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젊은이들 사이에는 이 애정표현이 유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미국에 와서 살고 있는 동포들을 포함해서 우리나라사람들 대부분은 그날의 연유를 잘 모르지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그 진짜 연유가 분명치 않은 까닭이다.
기독교가 숭상하는 성인들 중에 Valentino라는 이름을 가진 성인이 여러 명 있다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숭상하는 Valentino와 동방정교에서 숭상하는 Valentino가 동일인 인지 분명치 않은 것 같고 같은 교파에서도 지역과 나라에 따라 숭상하는 Valentino가 같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 같다.
실제 동방정교에서는 6월이나 7월에 Valentino 를 기념 하는 날이 있다고 하는데 막상 천주교에서는 그의 이름은 알려져 있으나 사실상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이유로 1969년 이후에는 천주교 달력에서 Valentine’s Day는 없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2월14일은 Lutheran Church와 Anglican Church가 1800년대에서 기념하기 시작했던 것이 그대로 전수된 것이라고 한다.
가장 널리 공인되고 있는 원조 St. Valentine은 4세기경 로마에 있던 천주교 주교였다고 한다. 당시의 로마는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군인들의 결혼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이런 군인들을 비밀리에 결혼시켜 주었다는 등의 죄목으로 Valentino 주교는 체포되었는데 당시의 Claudius 로마황제는 만일 Valentino 주교가 로마제국종교로 개종 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였었으나 그는 도리어 황제를 천주교로 개종시키고자 하였었다고 한다. 아마 사형을 받았을 Valentino 의 장삿날이 2월14일이라고 하며 천주교에서는 800년경부터 Valentino 주교를 순교자명록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Valentino 주교는 처형되기 얼마 전 간수의 눈이 먼 어린 딸을 눈을 뜨게 만들어서 간수일가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였었다고 한다. Valentino 주교는 처형전날 간수의 딸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 “Your Valentine” 이라고 서명하였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손으로 써서 주었고 heart 형으로 만든 달콤한 과자를 Valentine’s Day 에 주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어느 지역에서는 “내 heart를 열어 주오” 라는 의미로 St. Valentine 열쇠를 선물하기도 한다고 한다. St. Valentine은 사랑과 결혼의 수호성인이지만 간질병환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고 한다.
지금은 인쇄소에서 대량으로 상업적으로 찍어낸 카드에 사인해서 보내고 공장에서 역시 대량으로 만들어낸 초콜릿을 교환하고들 있어 원래 중심이 되었던 Romance 는 많이 퇴색되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월12일에 같은 교회에 나가고 있는 어느 권사님으로부터 “한국 사람들은 2월14일이 연인들 간에 초콜릿 나눠먹는 날인 Valentine’s Day 라기 보다는 105년 전에 안중근의사가 사형언도를 받은 날로서 추념하여야 한다”는 다소 교훈적인 충고를 e‐mail로 받았다. 깜박 잊고 조상의 제삿날에 모르고 오페라 보러갔다가 온 사람 같은 죄책감이 들어 빨개진 얼굴로 얼른 Google 을 들춰보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것을 입고 가거라.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안중근의사는 천국에서 만나자는 가슴 아픈 답장을 어머니에게 보냈다고 한다. “성공한” 남자의 뒤에는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가 있다는 명언이 있지만 훌륭한 인물들 앞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는 진리가 아마 한발 더 먼저일 것 같다. 아내의지극한 보살핌을 받은 사람이 다 성공한다거나 훌륭한 어머니의 아들들이 꼭 훌륭하게 된다는 논리는 아니지만….
서두에 인용된 안 의사 모친의 마지막 편지를 읽으면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이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짧은 “주기도문”을 암송할 적마다 “와, 여기에 성경 전부와 기독교가 다 들어 있구나” 라고 감탄하게 되는 것처럼.
오래전에 안 의사의 모친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처음 읽으면서 온몸이 통째로 얼음물 속에 던져진 것 같은 전율을 느끼면서도 재판과정에서부터 사형당할 때까지 도리어 자랑스럽고 떳떳했던 안 의사의 모습이 깊은 뿌리가 있는 것이었구나 하고 훈훈한 자랑스러움을 느꼈었다.
이번에 다시 그 글을 읽으면서도 처음과 똑같은 감명을 받았다. 세상의 몇 어머니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당면한 의로운 자식에게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끝까지 떳떳하게 살다가 내가 보내는 수의를 입고 죽어라” 라고 격려하며 보낼 수 있을까! 하고. 조 마리아여사는 인생은 꼭 오래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철학을 가진 분이었던 것 같다. 그분은 몇 마디로써 인생은 일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현세의 죽음은 영생으로 이르기 위해서 누구든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첫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실한 천주교도적 신앙심을 보여주고 있다.
“무슨 구닥다리 같은 소리요” 라는 핀잔을 줄 독자들이 많으실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필자는 조 마리아여사가 필자와 종씨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기까지 했었다. 필자의 조상들 중에는 “열사”라는 칭호를 받을만한 분들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충신”이 었다는 칭호를 받은 분들은 몇 분들이 있는데 모두가 다 뒤끝이 좋지 않았던 분들이다. 성군 밑에서는 충신이라는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고 태평성세에는 “열사” 나 “의사”가 나올 수 없는 법이다. 어느 나라에 충신이나 열사가 많았다면 그 나라의 운명이 거칠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중근의사는 서른 살이 되던 1909년10월26일에 후일 법정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하르빈역에서 “대한제국 의용군중장”으로서 적군 이토 히로부미 사살한 후 1910년 2월 14일에 사형언도를 받았고 다음달 3월 26일에 사형되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퇴위시킨 죄…, 14.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등 열다섯 가지의 이등방문의 죄목들을 일일이 나열하였었다. 안 의사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쓰다가 마치지 못하고 사형되었다.
역사적 환경이 달랐던 것이 그 이유이었겠지만 미국에는 우리의 안중근의사에 비교될 만한 인물은 찾기가 힘든 것 같다. 미국의 독립 전쟁 때 몸을 받혀 미국을 탄생시킨 용사들이 여러분 있었을 것으로 생각은 든다. 그러나 필자는 백인들의 끊임없는 정복에 대항하여 부족을 보존하려고 끝까지 결사 투쟁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American Indian 추장들 몇 명이 아마 진짜 미국의 안중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제 주변의 형제들이나 나라야 어찌되었던 간에 내 등만 따뜻하고 내 배만 부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들로 가득 찬 나라는 상상해 보기도 싫다. 그러나 “틀린 것은” 다 바로 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열사와 의사로만 가득 찬 세상도 너무 으스스하리라고 생각된다.
일 년 중 어느 하루를 정해놓고 초콜릿을 나눠먹으며 실상은 눈에 잠시 안개가 덮인 까닭인 것도 모르는 채로 달콤한 꿈에 녹아드는 젊고 늙은 Juliet와 Romeo가 없는 세상은 너무 추워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Cupid의 화살이 항상 heart에 명중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쏜 화살이 없으면 명중하는 화살도 있을 수가 없다. 화살은 쏘아대야 한다. 다만 활 쏘는 재미에 너무 빠져 오늘이 조상의 제삿날이라는 것까지 잃지는 말자는 얘기이다.
2월14일을 ‘안중근의사 추념일’로 정하고 그날 전교생이 학년별로 행사에 참여하는 초등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찬사를 드리고 싶다. 충북 청주 흥덕초등학교는 “우리는 안중근의사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있음을 기억 합니다.” 라는 주제로 작년부터 이 행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기념행사는 이 학교의 조인숙 교감선생님의 제안으로 이진웅 선생님의 행사내용작성으로 유승교 교장선생님의 주관아래 금년에도 거행되었다고 한다. 금년에는 학교에 초콜릿을 가지고 오는 학생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앞으로 초콜릿도 많이 가져와서 나누어 먹고 기념행사도 더욱 다양해지고 다른 초등학교로, 중학교로, 고등학교로, 아니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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