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이민자들의 간절한 희망이 한 반이민 판사의 정치적 결정에 의해 다시 한 번 보류되었다.
오랫동안 그늘에서 숨죽여온 서류미비 이민자들에게 이번 주는 설레며 기다려왔던 시간이었다. “추방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일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게 해줄” 오바마 대통령의 이민행정명령이 시행에 들어가는 주였다. 그러나 실현을 눈앞에 두고 희망의 문은 다시 닫혀버렸다.
16일 텍사스의 연방지법 판사가 400여만 서류미비 이민자에게 추방유예와 노동허가 발급조치를 확대하는 이민행정명령의 시행을 잠정 중단시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고 이에 따라 17일 오바마 행정부가 시행 연기를 발표한 것이다. 드리머들의 추방유예 신청서 접수가 시작되었어야 할 18일엔 전국 곳곳에서 실망과 분노의 항의시위가 잇달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결정은 아니었다. 지난해 말 텍사스를 선두로 26개주가 연합해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그 담당판사가 강경보수파 앤드루 헤이넌으로 알려지면서 백악관도 어느 정도 각오한 결과였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한다.
오바마의 이민정책을 “가장 위험한 범죄자들에 대한 무제한 초대” 등의 극언으로 공개 비난을 서슴지 않아온 헤이넌은 반이민 법정을 찾아 ‘판사쇼핑’을 했다는 이번 소송 원고들에겐 더 바랄 것 없는 적임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헤이넌은 ‘사면’ ‘침입자’ ‘불법외국인’이라는 표현을 남발하며 그들이 원하던 결과를 안겨주었다.
이민행정명령에 대한 ‘위헌’ 판결은 아니다. 시행을 일단 중지시키는 가처분 명령이다. 가장 핵심 이슈인 “오바마가 이번 행정명령을 시행할 권한을 가졌는가”에 대한 결정은 남겨두고 이번 소송이 연방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충분한 요건을 갖추었다고 인정하면서 위헌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시행을 중단시킨 것이다. 헤이넌 판사는 행정명령 시행이 일단 시작되면 “치약을 튜브에 도로 넣을 방법이 없듯이” 돌이키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소송이 정당하다는 근거로 두 가지를 들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행정절차법 위반과 이민행정명령이 시행될 경우 26개 주정부에게 가해질 ‘막대한’ 피해다.
69년 전에 제정된 행정절차법은 행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이를 예고하고 일정기간 여론을 수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행정부는 “추방유예 프로그램은 개별적 신청접수를 요하고 있어 총괄적이 아닌 행정부처의 케이스별 재량권에 속한다. 따라서 여론수렴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용범위에 대한 해석이 불확실한데다 관련 판례도 거의 없어 헤이넌 판사의 결정을 번복시키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으로 일부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연방법원은 원고가 ‘법적 지위’를 갖추었을 경우에만 소송을 받아들인다. 소송의 이슈가 된 행동에 의해 원고가 입는 직접적인 피해를 증명해야 한다. 헤이넌 판사는 서류미비 이민자들이 합법체류를 허용 받을 경우 주정부의 운전면허 발급 경비를 예로 들면서 연 1,000억 달러 규모 예산을 운용하는 텍사스 주정부의 ‘막대한 피해’를 인정했다. 합법신분이 된 이민자들이 낼 세금과 생산성 제고에 의한 경제 활성화의 긍정적 요소는 고려할 의도조차 없었을 것이다. 같은 근거로 제기되었던 애리조나 주 한 카운티의 소송은 지난달 워싱턴DC 연방지법에서 ‘직접적 피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각 당했다.
오바마 이민정책의 발목을 잡은 헤이넌 판사의 결정 이후 전망은 현재로선 “불확실하다”가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확실한 것은 이번 판결이 대법원까지 계속될 길고 복잡한 법정투쟁의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이민행정명령 시행이 가장 빨리 시작될 수 있는 길은 항소법원의 긴급명령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항소할 것이라고는 밝혔으나 헤이넌의 결정을 번복시킬 긴급 명령을 요청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위헌 여부를 가리는 최종재판에서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지만 긴급 명령 요청에선 성공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래도 요청이 받아들여진다면 추방유예 신청은 몇 주내에 시작되어 최종판결이 나올 때까지 계속 진행될 수 있다.
이민사회의 좌절과 분노, 긴 법정투쟁…이 갈등의 진원지는 ‘포괄적 이민개혁안 통과’라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연방의회다. 이민행정명령은 그 때문에 발동되었다. 그런데도 또 국토안보부 예산안을 볼모로 잡고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공화당 의회에게선 이번 판결을 정국 해결의 계기로 삼으려는 성숙한 의지는 찾기 힘들다. “권력남용 대통령”의 “불법사면이 중단 당했다”는 환호만 들릴 뿐이다.
이들을 향한 이민사회의 메시지는 단호하다 - “텍사스의 결정은 누가 반이민인지를 분명하게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 2016년은 그리 멀지않았다”
2012년 애리조나 주 이민악법 관련 재판을 통해 연방대법원은 이민정책은 “주정부가 아닌 연방정부 소관이며 연방법은 주법에 우선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도 엊그제 “법도 우리 편이고 역사도 우리 편”이라며 이민행정명령의 앞날을 낙관했다.
수백만 이민자들의 꿈을 압류한 반이민 판사의 정치적 결정은 몇 주가 걸리든 몇 달이 걸리든 결국 번복될 것이다. 그래야 한다.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끈질기게 기다리면 된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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