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에 이미 상당한 길이의 철로가 설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운하에만 비중을 더 주었던 펜실베니아 주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주들이 철도가 앞으로 미국의 동맥이 될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1840년대에 이르러서는 총 운하 길이만큼 긴 철로가 미국에 건설되었다. 서부로 점점 뻗어나가는 철로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철로가 1850년대에 설치되었다.
10년 동안에 미국의 철로는 8,876마일에서 30,626마일로 늘어났는데 이것은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 거리이었다. 당시 서부라고 불리던 오하이오 주와 일리노이 주가 철로 건설에 선두를 달렸는데 1833년까지는 아직 정식으로 도시로 설립 되지도 않았던 시카고가 철도 때문에 1860년에 이르러서는 세계에서 가장 번잡한 철도 운송의중심 대도시가 되었다.
미국의 철로가 그 광활한 지역에 초고속으로 설치되는 것을 1840년대와 1850 년대에 시찰하려고온 유럽의 철도전문가들은 미국의 철로들을 보고 놀라서 기절할 뻔 했었다고 한다. 미국의 여러 강들과 호수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고압증기 엔진을 수송선들에 무지한 방법으로 쓰고 있었던 것처럼 철로의 건설과 열차의 운행도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무모하게 운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1850년대의 미국 철로는 비용의 절감을 위해서 대부분 단선이었다고 한다. 열차의 정면 충돌사고가 가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철로 중간에 산이 있을 때에 터널을 뚫거나 산을 완만하게 경사가 지도록 깎아서 철로를 놓는 것이 아니고 산위로 기차가 그대로 올라갔다가 산 반대쪽에서는 그냥 내려가도록 철로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산꼭대기 지점에 눈과 얼음이 있으면 그 눈과 얼음 위에다 침목을 놓고 그냥 철로를 놓았었다고 한다.
봄이 와서 눈이 녹으면 철로가 망가지는 것은 당연하였다. 산꼭대기에서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빨리 내려오던 기차가 급격하게 구부려 놓은 커브에서 탈선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1850년대 에는 열차사고가 증기기선 보일러 폭파만큼이나 자주 있어서 열차를 타본 경험이 있는 승객들은 중간에 있는 객차에 탔었다고 한다. 드디어 빈번한 탈선사고 끝에 증기기관차의 무게를 줄이고 커브에서 탈선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치 자동차의 앞바퀴처럼 철로를 따라 전진방향이 쉽게 변하는 작은 바퀴들을 단 수레위에 기관차 앞부분을 얹어서 탈선의 위험성을 줄인 기관차 개량이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철로는 민간자본으로 다소의 주정부보조를 받아 민간회사들이 설립하였다. 연방정부는 땅의 측량을 해주었으며 철로수입에 붙이는 관세를 낮추어 주었다. 1850년대부터는 연방정부가 수천 에이커의 땅을 철도회사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서 그 위에 철로를 놓게 하고 땅을 팔아서 철로건설 자금으로 쓰게 하였다. 영국에서는 도시와 도시를 연결 하는 식으로 철로가 건설되었지만 서부의 새 땅으로 뻗어나가고 있던 미국은 사람이 한명도 없는 황무지에 철로를 놓아 갔었다. 철로가 놓이면 새 개척민들이 따라와서 농토를 개발 하고 새 도시들이 생겨났었다.
황무지에 새 철로를 건설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공사이었다. 산이던 강변이던 가릴 것 없이 노동자들의 거주부락이 따라다니며 세워져야 했었고 그 노동자들의 식량과 생활용품을 조달했다. 산을 깎아 내고 숲을 제거하고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고 지면을 편편하게 다지고 침목을 놓은 후 아주 값비싼 철로를 깔아야 했었다 엄청난 규모의 민간자본 동원이 필요했다. 사업의 부진으로 기업체가 파산하게 될 경우 투자자의 최대손실을 투자한 액수를 날리는 것만으로 제한하는 유한책임 주식합자 회사 (Co., Inc./Co., Ltd.) 들이 설립되어 철로건설에 투자되었다.
1860년에 이르러서는 증기기관의 힘으로 미국은 전국이 강 호수 운하 철로 등으로 연결이 되었다. 남북 간의 교역이 활발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철도를 이용하여 서부의 농산물들이 동부의 도시들로 직접 운송되었고 동부의 공산품들도 서부로 직접 운송되었다. 산업이 남북 동서로 분업화 되었지만 상호보완적인 체제가 세워진 것이다. 상업이 활발해 지기 위해서는 운송수단과 병행해서 통신수단도 발달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무렵 미국의 우편제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이 아직 영국의 식민통치아래 있었던 (영국은 1650년대부터 우편제도가 있었다고 함) 1775년 이전에도 “우편제도”는 있었으나 1787년의 헌법의 규정에 따라 미국국회는 ‘post offices’ 와 ‘post roads’ 를 설립하였다. “우정성”의 수장인 Postmaster Genera 은 국무위원이었으며 보통 대통령선거위원장을 한 사람이 임명되는 등 정치적임명의 요직이었다.
Postmaster General 은 1971년 우정성이 우편공사로 재개편될 때까지는 정치적인자리였고 지방우체국장인 Postmaster도 전통적으로 정치적으로 임명되어 왔었다. Post roads 는 우편전용도로이었으며 일정한 구간의 우편도로를 왕래할 말들을 관리 하는 역이 post office였다. 처음에는 동부해안을 따라 post road가 한 개만 있었으며 워싱턴 대통령시절에는 일 년에 미 국민 12인당 한 개의 편지가 오갔을 정도로 한산 하였었다. 그때에는 수신자가 우편료를 부담하였다. 우편료가 없으면 우편물이 전달되지 않았고 가정배달은 없었고 수신자가 우편국에 가서 우편물을 받아야 했었다.
1825년에 이르러서야 우체국장의 재량에 따라 우체부가 집으로 편지를 배달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나 우체부들은 월급이 없이 수신인으로부터 받는 우표로 로 생활을 하였고 여전히 우편료를 내지 못하면 우편물은 전달되지 않았고, 만일 주인이 집에 없었을 경우에는 우편물은 우체 국으로 돌아갔었다. 1840년에 이르러서는 미국은 더 효율적이고 더 저렴한 우편 제도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고 국민들은 우정이 관공서에 독점되어 있는 것이 우편무능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정성을 폐지하고 민영화 하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국회는 1845년에 싼 우표를 쓰기로 하고 우체국장이 우표를 각각 인쇄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으나 우편배달 난맥은 계속 되었다. 1847년에 개혁된 우정성은 5센트와 10센트짜리 우정성우표를 발행하기 시작하였으나 농촌의 외딴집 에는 여전히 가정배달이 없었다. 1896년에 이르러서야 국회는 외딴 농촌 집에까지 별도의 요금이 없이 우편배달을 하는 입법을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무척 어리석었던 행정이었지만 아직 가난했던 미국으로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이었다.
급히 성장해가는 미국의 상업과 제도들은 우편제도보다 훨씬 더 신속한 통신 수단이 필요해져가고 있었다. 종이에 써놓은 글을 물리적으로 전달해야만 하는 기존의 우편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장벽에 도달한 것이다. 발명의 나라답게 혁신적인 통신수단이 발명되었다. 수신이 필요한 것은 메시지가 적힌 종이가 아니라 ‘메시지’이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메시지만 전하면 되는 것인데 이런 수단이 발명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tele(far 멀리) graph(writer 쓰기) 라는 멋있는 희랍어까지 써야 할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무엘 F.B. 모리스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많은 천재들이 그렇듯이 그림이외에도 재주가 많았었다고 한다. 그는 한해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배위에서 어떤 승객과 함께 전기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던 중 “전기를 이용해서 문자를 보내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모리스 전에도 여러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해본 사람들은 있었으나 그 방법을 끝내 연구해낸 사람은 없었다. 모리스는 애초 전기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던 사람이었던 탓에 만용을 부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전기에 대해서 배우면서 연구하던 끝에 무모한 공상을 전신으로까지 발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림 가르치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5년간 연구에 몰두한 끝에 ‘따 따다 따아 …’ 라는 발수신음으로 상징되는 모리스 부호와 전신 기구를 발명한 것이다. 이 전신 방법은 그 후 1960년대까지도 백여 년간 전 세계에서 쓰여 졌다.
그는 또 국회를 설득하는데 6년이 더 걸렸다. 1843년에 국회는 3만 달러를 모리스에게 주었으며 그는 워싱턴과 볼티모어를 전선으로 연결하여 1844년 5월24일에 첫 전신을 보내었다. 그는 두 동업자들과 함께 1848년까지에는 메인 주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까지, 서쪽으로는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밀워키 까지 전신망을 연결하였다. 이제는 신문들까지 기사를 전신으로 보낼 정도로 통신의 혁명을 일으켰다.
Cyrus W. Field라는 뉴욕의 사업가는 회사를 창립하여 수년간의 실패를 극복하고 1858년에 미국과 영국과의 해저전선을 설치하여 미.영 간에 전신왕래가 시작되었으나 수주일후 전선에 고장이 났다. 그 얼마 후 발생한 남북전쟁 때문에 미.영 간의 전신은 끊어졌다가 1866년에 새 해저전선이 설치되었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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