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2월은 예산전쟁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다. 첫 월요일 대통령의 예산안이 연방의회에 제출되면서 9월말까지 천문학적 금액의 용도를 둘러싼 길고 지루한 싸움이 시작된다.
미 정부의 돈줄을 쥔 것은 의회다. 예산편성 권한이 전적으로 의회에 속해있다. 대통령의 예산안은 말하자면 일종의 참고 자료다. 역대 대통령의 예산안이 현실적인 플랜보다 이상적인 비전을 담아 정치적 성향을 띠워온 것은 그 때문이다.
2일 제출된 오바마 대통령의 4조달러 규모 2016 회계연도 예산안 역시 실용적인 청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난달 국정연설을 통해 다짐한 ‘부자 증세로 중산층 살리기’라는 진보적 어젠다 추진을 위한 야심찬 플랜으로 가득 찬 선언서였다. 공화당의 반응도 강경하다. 제출 전부터 ‘도착 즉시 사망’ 경고가 잇달았다.
오바마의 예산안만 이렇게 푸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민주당 의회의 위협과 경고에 시달리던 나머지 레이건도 “도대체 왜 내가 이렇게 까지 하며 예산안을 그들에게 보내야 하는가?”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참모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 “법이 그렇습니다”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도, 참모들도 예산안의 의미가 법적 의무를 넘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산이란 숫자로 표현한 정부의 정책이다. 정부의 우선과제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한편 의회에 협상의 여지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를 알려주는 제안서이기도 하고 선거를 앞둔 해엔 유권자들을 사로잡기 위한 캠페인 전략서이기도 하다.
금년 오바마 예산안은 제출 분위기부터 지난 몇 년과는 조금 달랐다. 취임 후 오바마는 한해를 제외하곤 2월 첫 월요일이라는 제출시한을 지킨 적이 없었다. 2013년엔 상하원이 제각기 예산안을 공개한 후인 4월 중순에야 간신히 제출하기도 했다. 금년엔 날짜도 정확히 지켰고 홍보에도 적극적이었다.
내용도 달라졌다. 지난해까지 예산편성의 기본 요건이었던 ‘적자와 부채’가 사라졌다. 적자의 주범으로 지목되어온 소셜시큐리티 등 사회안전망프로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었다. 적자감소와 경제성장에 힘을 받아 중산층 재건과 소득불평등 해소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늘 적자의 위험성과 치솟는 연방부채를 우려했던 오바마가 금년엔 과감하게 자동예산 삭감조치인 ‘시퀘스터’ 종식을 요구하고 나섰다.
예산안 실현에 대한 기대치는 백악관 내에서도 극히 낮다. 그러나 낙관적 전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패키지로서의 예산안은 공화당에서 거부하고 있지만 각 개별조항으로 들어가면 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여지가 곳곳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증세에 결사반대하는 공화당 의회와 증세로 복지지출 늘이겠다는 민주당 대통령의 초당적인 ‘대타협’을 추구하던 시대는 끝났으나 작은 타협의 가능성은 살아있다고 LA타임스의 도일 맥마너스는 분석한다. 예를 들어 행정부의 목표 중 국방예산 증액, 도로와 교량 등 낙후된 기간시설 보수, 기업세제 개혁은 공화당도 원하는 사안이니 이 공통분모를 작은 협상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기대다.
오바마 예산안의 보다 중요한 의미는 현재 미국의 최우선과제에 대한 논쟁의 쟁점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 공화당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인정하는 중산층의 정체현상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저소득 근로계층의 상향이동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가.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경제에 뒤처지지 않도록 미국 노동력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지름길은 무엇인가.
오바마 예산안은 중·저소득층에 대해 세제혜택, 프리스쿨에서 커뮤니티칼리지까지의 무상교육, 직업훈련 등으로 계층 상향이동을 지원하고 기간시설 보수로 안전한 환경과 일자리 창출을 동시에 모색하는 등의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재원은 그동안 조세 허점을 이용해 불공평한 이득을 취해온 부자와 기업에 대한 증세로 충당하여 재정적자 확대를 초래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공화당은 이 같은 제안을 “재분배주의”이며 “잘하고 있는 부문을 착취하는 질투의 경제”라고 일축한다. 워싱턴포스트의 유진 로빈슨은 오바마 제안에 대한 바른 표현은 ‘누진과세’라고 반박한다. 누진과세란 더 많이 버는 사람에게 더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제도다. 일리노이 대학이 2007년 132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세금제도와 국민의 행복감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국민들은 정부가 누진과세할 때 행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산규모와 상관없이 혜택과 부담을 얼마나 공평하게 나누는가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상원과 하원의 예산안도 4월 중순 전에는 나올 것이다. 이어 10여개의 분야별 세출안의 세부사항을 논의하여 양원의 절충을 거쳐 9월말까지 통과시켜야 2016 회계연도 예산안이 백악관으로 송부될 수 있다. 그러나 정규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한 것은 2009년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는 잠정예산안으로 연명하고 있다. 공화당의 몽니가 예산안을 발목 잡아온 주범이었다.
새롭게 출범한 공화당주도 의회의 필수 과제 중 하나는 정규예산안 통과다. 백악관, 민주당과 타협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난제가 되고 만다. 오바마의 예산안을 무조건 반대만 할 수 없는 공화당의 고민이 거기에 있다.
공화당 자신을 포함하여 전국의 표밭이 던지는 화두는 “공화당도 통치할 수 있을까” - 2016 회계연도 예산안이 그 최대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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