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ler는 대통령 취임 후 대통령은 국회가 입법한 법률만을 집행하는 직책이 아니고 때로 는 국회와 대립해 가면서 국가정책을 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강성대통령”임이 들어 난다.
그는 Harrison 대통령에게 애를 먹였던 같은 당의 Clay 하원의원을 곧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헌법협의해석주의자”이기도 했던 Tyler 는 Whig 당이 주동해서 입법한 국립은행 재설립, 관세율 인상 등 몇 개의 “진보적”인 법률들을 위헌이라고 생각해서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그의 취임 얼마 후에 당시 외국과 조약을 협상 중이던 Webster 국무장관을 제외하고 전 각료가 사직하였고 Whig 당은 그를 종래에는 출당시켜 버렸다.
그들은 Tyler 를 “Accidental President” 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His Excellency” 대신 “His Accidency” 라고 비꼬아 불렀었고 “traitor” 라고도 불렀었다고 한다. 1844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자 계획했던 Tyler 는 Whig 당과 민주당 양쪽에서 다 지지를 받지 못하자 출마를 포기했다. 그는 국내정치에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으나 외교적으로는 여러 가지 공로가 있었다. Canada 와의 국경문제, 5대호 관활 문제, 범인인도조건 등의 난제를 영국과 합의한 Webster‐Ashburton Treaty 를 영국과 맺었으며 중국을 미국무역에 개항시킨 Wanghia 조약을 .청나라와 체결하였다.
이무렵 미국 ”개척민” 들이 처음에는 Mexico 의 허락을 받아 서남쪽으로 이주해와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정착해가다가 종국에는 Mexico 와의 수차에 걸친 전투 끝에 “독립”을 선포했다. Sam Houston 대통령 휘하의 Texas 공화국 이 미국에 합병되기를 요청해오고 있었다. 미국은 Texas 공화국을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맺어오고 있었으나 합병을 할 경우에는 Mexico 와의 전쟁이 불가피 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Mexico 는 1821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Texas 와 California 를 포함한 현 미국의 서남부쪽 주들이 된 대부분의 땅들의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미국이 합병을 허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Mexico로 부터 계속적인 위협을 받고 있던 Texas 공화국 은 드디어 영국과 불란서와 조약 협상을 시작하였다. 영국은 Texas 와의 조약으로 미국의 서부 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막고 자국의 면방직산업을 위해 Texas 의 면화를 확보하고 자국 공산품을 Texas 에 수출하겠다는 속셈이 있었고 Texas 는 Mexico 로부터의 보호와 기타의 원조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산업구조상의 차이에서 시작된 남북 간의 대립은 이 문제에 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또 노예허용국인 Texas 가 미국에 합병되면 노예허용주 가 당장에 하나 더 늘어날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 거대한 땅덩어리가 수많은 작은 주로 분할 될 경우 노예허용주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이유에서 북부 주들은 합병을 반대하고 있었다. 남부출신 Tyler 대통령은 자기 임기 중에 이 문제를 해결해놓고 퇴임하고 싶었으나 1844년 11월에 상원은 Texas 합병조약을 압도적으로 부결시켜 버렸다.
그러나 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그의 임기가 끝나기 한 달 전인 1845년 2월에 Texas 가 합병되더라도 4개주이상 으로 분할될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된 합병을 허락하는 입법을 해놓아 제11대 Polk 대통령 때 합병이 이루어졌다. 노예주의 증가를 우려하던 북부주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그때까지 영국과 소유권문제로 마찰의 씨앗이 되어왔던 Oregon 도 (후일 비노예 주가 된) 1845년에 합병되어 미국의 영토가 드디어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이르게 되었다.
Tyler는 1861년에 남북전쟁이 났을 때 남부를 지지했으며 전쟁 중에 남부국회에 하원의원 으로 당선 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미국역사가 들은 그를 크게 훌륭한 대통령으로 치지 않으며 미국의 문화역사에도 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치는 것 같다.
1844년 대통령 선거에 Whig 당은 Henry Clay 를 대통령후보로 내놓았다. 민주당 측에서는 원래는 전 대통령 Martin Van Buren 이 유력한 후보로 등장하였으나 그가 대통령 재임 시에 Texas 합병을 반대해 왔던 것이 남부 주들의 눈에 거슬려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민주당은 차라리 국민들에게 성분이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전에 테네시 주지사를 지낸 정도로만 알려진 dark horse James K. Polk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Texas 합병문제가 중요한 선거이슈가 되었는데 “나는 Expansion (확장주의) 을 주장 한다” 라고 조금 애매한 소리를 하였으나 이것은 남북의 비위를 다 거스르지 않고 “영토를 확장합시다” 라고 남북 어느 쪽도 정면으로 거부 하기는 어려운 선거작전 구호가 되었다.
Expansion 이라는 구호에 북부사람들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눈치 챈 Clay 후보가 “노예제도가 가장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나도 Expansion 을 지지하는 사람이오” 라고 뒷북을 늦게 쳤지만 도리어 선거에 역작용하여 Polk 가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미국에 polka dance 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이어서 Whig당 쪽에서 만일 Polk가 당선되면 Polka Dance 처럼 “후진 두발자국, 전진 한발자국” 으로 미국이 후진하게 될 것이라고 내세웠던 선거 구호가 무색하게 민주당의 선거 전략이 맞아떨어졌었다. 이때부터 언론인 O’Sullivan 이 내세운 “미국은 이 미대륙을 개척하고 문명화하라는 임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라는 골자의 Manifest Destiny (명백한 숙명) 라는 구호가 미국 사람들 사이에 점차 높은 목소리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California 도 합병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liberty 를 위하여 전 세계가 모범으로 우러러 볼 A house upon a hill 을 짖고자한다” 라고 외치면서 시작한Puritan 들의 검소했던 나라가 이제는 “우리는 세계를 문명화 시키라” 는 신의 임무를 받았다고 동시에 외치는 나라가 된 것이었다. 미국이 역사적 전환점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Ralph Waldo Emerson 이나 Henry David Thoreau 같은 당시의 미국의 철학자 작가 등은 호전적이고 이기적으로 변질되어가는 미국의 장래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글로 표명하였었다.
미국국민들 사이에 Mexico 와의 일전불사라는 분위기 가 조성되어가는 것을 보고 Emerson 은 “Mexico 와 전쟁을 하면 미국이 이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Mexico 와 전쟁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독약을 자진해서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독약은 결과적으로 미국을 죽게 만들 것이다” 라고 경고하면서 전쟁비용의 조달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납세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차츰 자리가 잡혀가기 시작 하는 자본주의 경제제도 하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새 이민 도시노동자들의 사회적, 구조적, 제도적 착취와 천대를 방지하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humanist)개혁주의 자들도 대두하기 시작하여 역사의 방향을 바로 잡아보고자 노력한다. 불구인 보호운동, 무상교육 운동, 여성인권 보호와 평등, 근로자 보호운동, 열악한 도시주택개선 등의 사회 개선을 주장 하는 선구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Texas 를 자국영토로 주장하던 Mexico 는 미국의 Texas 합병을 미국의 Mexico 에 대한 도전행위로 간주했다. 한편 Texas 와 비슷한 경위로 California에 가서 살고 있던 미국개척민들도 미국이 California 를 Texas 처럼 합병해 주기를 원했었다. California 남부의 개척민들은 Mexico 군인들을 쫓아내고 흑곰을 그린 국기를 내걸고 California 독립을 선언했다. 얼마 후 미국해군이 상륙하여 미국 기를 바꿔달면서 이 “공화국”은 끝나버렸지만… Polk 대통령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California 문제를 해결 해 보고자 했다. 그는 Zachary Taylor 장군을 사령관으로 한 미군 2천명을 Mexico City 에 보내서 California 와 New Mexico 를 3천만 달러에 미국에 팔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Mexico 는 당시 혁명의 와중에 있었고 Polk 의 교섭단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얼마 후 1846년 4월 에 Mexico 군대가 미국척후병 16명을 사살하였고 미국은 Mexico 가 전쟁을 시작했다는 이유를 들어 선전포고를 하고 난후 Taylor 장군은 두어 군데의 전투에서 Mexico 군들을 격파하였으며 이듬해인 1847년 9월에 Winfield Scott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Mexico City 를 함락하고 Mexico 는 미국의 모든 요구를 받아드려서 Texas 가 미국에 속한다고 인정하였다.
이 전쟁 끝에 맺어진 평화조약에서 Mexico 는 Texas 와 태평양 사이에 있는 모든 땅들을 미국에 양도하기로 하였다. 형식상으로는 미국이 Mexico 로부터 “현금 천오백만 불과 미국 사람들이 Mexico 에 대해서 가진 손해보상권 약 삼백만 달러를 미국이 대납해주는 것”으로 사들인 이 땅들에는 California, New Mexico, Utah, Nevada, Arizona, Colorado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땅들이 미국의 영토에 합병됨으로서 그 후에 추가된 Alaska 와 Hawaii 를 제외한 현재의 북미주 대륙국가가 되었다.
이때 Mexico로부터 넘겨받은 Texas와 California 등의 면적을 다 합하면 초기 미국 13개주의 총면적보다도 더 넓었으며 Louisiana Purchase 때 Napoleon 으로부터 사들인 땅보다도 더 넓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조약을 약 10여명의 상원의원들은 반대하였는데 이유인즉슨 “Mexico 전국이 포함되었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부의 미국인들은 이때 이미 “미국제국주의국가”가 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merson의 예측은 거의 맞은 것이었 다고 할 수 있다. 불법밀입국을 하려던 Mexico 사람이 미국국경경비원에게 체포 되자 그는 “내 고향을 찾아가는데 왜 당신이 방해하는 것이오!” 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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