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저한 원리·원칙을 앞세운 슈틸리케 감독
▶ 지도자 인생 완성 위해 마지막 불꽃 태워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이 러닝을 하는 동안 직접 훈련용 마커를 들고 마치 수를 놓듯 세밀하고 정확한 간격으로 설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연합>
슈틸리케 감독은 내용과 무관하게 승리만을 추구하는‘실용축구’가 아니라 마치 오케스트라 공연처럼 팬들에게 감동을 주는 축구를 꿈꾸고 있다. <연합>
2015 호주 아시안컵에서 결승까지 진출, 오는 31일 개최국 호주와 최후의 결승전을 남겨놓고 있는 한국 축구대표팀은 사실 이번 대회에서 내용에 비해 결과가 좋았다.
조별리그부터 5전 전승을 거둔 것은 물론 단 한 번의 실점도 없이 결승무대에 올랐는데 대회 내내 실점이나 마찬가지였던 아찔했던 순간이 꼬리를 물었으나 끝내 무실점으로 결승까지 왔으니 행운이 따라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전체 슈팅 중 골로 이어진 비율이 14%로 참가 16개국 가운데 8위에 머물렀다. 결정적 찬스를 만들어낸 횟수도 적었다. 5게임에서 7골로 게임당 득점도 1.4골로 그리 신통치 못하다. 하지만 매 경기마다 고비에 값진 골이 터져 전승행진을 이어왔다. 조별리그에서 단 3골로 3승을 건지며 조 1위를 차지해 결승행 탄탄대로를 다진 것은 실리축구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태극호를 이끄는 울리 슈틸리케(61) 감독의 거세게 신드롬이 몰아치고 있다. 2002년 4강신화를 만들어낸 거스 히딩크 감독 이후 한국축구에서 이런 열풍은 처음이다. 내용은 신통치 못해도 승리를 이끌어내는 놀라운 능력으로 인해 ‘실용주의의 화신’으로 불리며 ‘다산 슈틸리케’라는 닉네임까지 얻는 등 한국축구팬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 슈틸리케 감독의 얼굴 한편에는 “이건 아닌데…”라는 듯한 불만의 그림자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라크와의 준결승전이 끝난 뒤 우승을 향한 길이 열렸다는 말에 ‘폭발’했다. “한국은 우승해도 더 노력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축구인생의 마지막 불꽃
이번 대회 초반 중국 기자들이 슈틸리케 감독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한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놓으면 중국으로 건너와 지도자 생활을 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중국 구단들은 일확천금일 수 있는 파격적 연봉으로 명장들을 영입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에 대해 “내 나이가 몇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며 “한국 사령탑은 내 인생의 마지막 감독직”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한국 감독직을 자신의 축구인생 마지막을 성대하게 불태울 기회로 삼고 있는 게 틀림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세계 최고의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와 영원한 월드컵 우승후보 독일 대표팀에서 선수로 찬란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영예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상대적으로 초라한 세월을 지냈다.
한 방송 해설가는 “슈틸리케 감독이 지도자 생활 전반에서 승리에 익숙하지 않은 감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패자의 처지와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도자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한국의 연승과 국민적 찬사는 슈틸리케 감독에게 생소한 일일 수도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대표팀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지도자 생활에서 한이 맺힌 승리의 갈증을 푸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세할 때도, 앞서있을 때도 ‘격분’
내용이 좋지 않아도 이긴다는 실리축구를 추구한다는 평을 받지만 그간 슈틸리케 감독이 보여주 행동만 보면 그는 결과만 쫓는 지도자는 아니다. 특히 경기 중 우세할 때도 역정을 내거나 승리해도 울분을 토하는 모습을 보면 내용과 관계없이 승리만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호주에 건너온 뒤 ‘한국 축구의 버릇을 뜯어 고치자’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선수들의 무의식에 또아리를 튼 것처럼 소극적이고 뒤로 물러서는 태도가 멀쩡한 기술과 체력을 좀먹는다고 봤다.
그렇기에 그는 패스가 이유 없이 옆이나 뒤로 갈 때면 팔을 휘저으며 불호령을 내렸다. 스코어에 여유가 있고 전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재미없고 느린 경기를 보면 한숨을 내쉬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불만에 대한 표현도 거침없었다. “지거나 무승부로 끝날 경기였다”, “운이 좋아서 이겼다”, “우승후보의 자격이 없다”, “기술은 모르겠으나 투지 때문에 선수들을 칭찬할 수밖에 없다”, “우승해도 한참 더 배워야 한다” 등등 따끔한 말들이 모두 무실점으로 승리한 뒤에 나온 말들이었다. 내용과 관계없이 이기는 것만을 추구 한다면 무실점 승리를 거둔 뒤 이처럼 쓴소리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철칙을 제시하는 근본주의자
슈틸리케 감독이 아시안컵을 위해 호주에 온 뒤 가장 많이 사용한 축구 용어는 ‘볼 점유율’이었다. 경기 때마다 훈련 때마다 강조하는 말을 들어보면 높은 볼 점유율이 최우선으로 지킬 원칙임이 틀림없다.
그는 “높은 점유율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횡패스나 백패스를 남발하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볼을 소유하며 끊임없이 전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서 “난 후자를 원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골키퍼까지 모든 선수에게 적용되는 슈틸리케 감독의 원칙이다. 그렇기에 볼을 자주 빼앗기는 선수는 필드에 나서기 어려워진다.
그 예로 이근호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최전방 공격수 1순위로 주목받았으나 지난 4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에 선발로 나왔다가 볼을 간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뒤 오만과의 1차전에서 벤치로 밀렸다. 슈틸리케 감독은 그 경기 후 “이근호는 볼 키핑을 못해서 뺐다”고 직설적으로 타박했다.
양질의 점유율 축구를 위해 공격수는 볼 점유의 마지막을 반드시 슈팅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점유율 상승이 슈팅의 증가와 비례하지 않을 때 슈틸리케 감독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정협은 단독찬스에서 슈팅 대신 황당한 크로스를 했다가 분노를 산 적이 있다. 미드필더와 수비수들도 볼을 빼앗기지 않고 앞으로 전진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골키퍼까지도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한 명의 필드 플레이어로서 적극적 점유율을 위한 패스 플레이의 한 축을 맡아야 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런 철칙에서 어긋나는 롱볼 플레이, 안일한 볼 관리의 조짐이 보일 때 불같이 화를 내거나 분을 억지로 삭이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한편 선수들의 몸 상태에도 철칙이 있다. 컨디션이 100%인 선수만 출전할 수 있으며 90%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별리그에서 매 경기마다 스타팅멤버가 7명씩 바뀐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벤치행은 컨디션 난조를 겪는 선수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몸 관리에 철저하지 않은 선수들에 대한 징벌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선수와의 의리, 친소관계에 따른 기용을 철저히 경계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슈틸리케 감독의 원칙 중 하나다.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수비진이 자주 바뀌는 원인을 묻는 한 한국 기자에게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라”며 갑자기 화를 낸 적이 있다. 격분할 질문이 아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를 나중에 물어보니 선수와 기자의 유착관계를 의심했다는 취지의 해명을 내놓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 내용보다 누가 출전할지에 더 신경을 쓰는 분위기에 놀랐다”면서 “친분이 있는 선수의 출전을 원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원리·원칙의 지향점은 ‘오케스트라’
슈틸리케 감독이 자신의 축구인생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울 원리·원칙을 앞세워 추구하는 그림은 무엇일까.
그는 잠시 심심풀이로 봤다가 나중에 결과로만 기억되는 축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축구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취임 무렵 기자회견 때 꺼낸 이런 말을 자주 되풀이한다. “또 얘기하지만, 텔레비전에서 그냥 그런가 보다 그러면서 보는 축구가 아니라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는 축구를 지휘하고 싶다.”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대표팀을 ‘오케스트라’, 축구경기를 ‘음악공연’에 비유하며 자신이 꿈꾸는 축구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선수가 지휘자가 될 수도 악기 연주자가 될 수도 있지만 전체의 조화로운 행위가 관중을 즐겁게 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 의무”라고 말했다. 이기더라도 내용이 좋지 않으면 슈틸리케 감독이 진 것보다 더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런 지론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도 넋을 놓고 앉아서 대표팀의 경기를 감상하는 경지가 오기만을 고대한다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지난 4일 사우디와 평가전을 앞두고 “이번뿐만 아니라 다른 경기에서도 벤치에서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최근에도 비슷한 맥락인 듯 연주자나 지휘자 역할에 미숙한 선수들에 대한 한없는 걱정을 쏟아내기도 했다. 기성용과 차두리 같은 선수가 볼을 잡으면 아무 얘기도 없이 지켜볼 수 있어서 즐겁다고 했다. 그러나 경험이 적은 선수들이 볼을 잡을 때는 벤치에서 일어나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슈틸리케는 승리만 추구하는 ‘늪 축구’ 또는 ‘머드 타카’가 아니라 팬들에게 감동을 주는 ‘오케스트라 축구’를 꿈꾸고 있다. 그의 타협없는 원리·원칙이 플레이로 구체화돼 한국 축구 경기가 멋진 오케스트라 공연처럼 펼쳐지는 때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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