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대 대통령 Martin Van Buren (1837‐1841)
제9대 대통령 William Henry 해리슨(1841, 3/4‐ 1841, 4/4) (#2)
제10대 대통령 John Tyler (1841, 4/4‐ 1845, 3/4)
해리슨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어느 부호 유력인사의 딸과 연애 하여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여자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그 아버지가 출장한 틈에 애인과 elope (결혼을 위한 도주) 하여 결혼해 버렸다. 결혼 후 이듬해에 연회석상에서 장인과 마주쳐 장인이 “네가 무슨 수단으로 내 딸을 먹여 살리겠느냐”고 힐문하자 해리슨은 ‘By my sword and my arms, sir’라고 항변한 후 열 자녀를 낳고 잘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 농장의 여자노예와 함께 여섯 자녀도 낳았다고 하며 그중 네 명은 노예로써 팔았다는 얘기를 지금은 흑인 유명인사가 된 그 노예의 후손이 주장 한다고 한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과 노예 Sally Hemings와의 관계와 얼핏 비슷하게 들리지만 제퍼슨은 상처한 후 독신으로 있으면서 벌인 일이었고 또 오랜 시간이 지난다음 일이기는 하였으나 후손들 간에 만나서 서로 인정하고 화해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때에는 군장교보직과 고급공무원 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겸직할 수도 있었던지 해리슨은 양쪽으로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그는 26세에 Indiana Territory의 연방하원 의원이 되었다. State가 아닌 Territory의 대의원이었던 까닭에 하원에서 투표권은 없었으나 Indiana Territory의 급속한 개척을 위해서는 그 지역 연방소유 땅들을 개척자들에게 싸게 파는 특별법을 만들도록 하였으며 농업이 발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노예제도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8세에 애덤스 대통령에 의해 Indiana Territory의 지사로 임명되었으나 제퍼슨 차기 대통령 측으로부터 정권 교체 후 지사를 해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의원직을 사퇴하고 지사에 취임하였다. 지사 재임 중 원주민들과 협상 하거나 위협으로 엄청난 면적의 땅을 “뺏어내었다.” Madison 대통령에 의해 장군으로써 Northwest Territory 지역 미 육군의 사령관이 된 해리슨은 본격적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 하여 원주민들을 토벌하고 원주민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처형하고 다녔다.
1812년 미영 전쟁이 시작된 후 원주민들은 영국과 손을 잡는 것이 백인들의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족국가연맹도 조직하고 영국의 무기원조도 받아드려 미국 측에 상당한 위협이 되어가고 있었다.
Harrison은 무자비한 방법으로 이들 원주민 들을 추격하고 토벌하였다. 1811년에 원주민들을 Tippecanoe 에서 많이 사상시켰으며 1812년 미영 전쟁 중에는Thames 라는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크게 섬멸하여 미국사람들은 그때의 승전을 Andrew Jackson의 New Orleans승전 다음가는 승전으로 쳤었다고 한다. 미국 국회는 그의 무공을 인정하여 금메달을 수여하였다.
이 토벌전투들이 Harrison을 “전쟁영웅”의 반열에 올려놓게 되었고 그 무공들이 그의 대통령 선거에 큰 선거운동 꺼리 가 되었었다. 그는 부유한 농장주이며 유명한 정치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 중에 “log cabin 에서 태어나서 알콜이 들어있는 애플 사이다를 즐겨 마시는 서민적 새로운 스타일의 정치가” 라고 헛소문을 내고도 다녔다고 한다.
현대적인 세계관으로 볼 때에는 그는 용납될 수 없는 백인우월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노예주의자 이지만 당시의 많은 미국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성품을 높이 평가하고 장점으로 생각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이다.
자신의 미국시민권 소유와는 상관없이 현대적 약소민족의 잣대로 2백여 년 전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비판하고 평가한다는 일이 정당한 것인가 라고 숙연하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동서와 고금을 초월하는 “진리의 잣대” 라는 것이 분명히 있으리라고 생각 한다.
그는 오하이오 주 연방하원의원과 상원의원도 지낸 후 오랜 공직생활 끝에 별로 모은 재산이 없이 고향의 농토에서 은퇴생활을 하다가 1836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근소한 표수 차이로 Van Buren에게 차점으로 낙선하였었다.
1840년의 대통령 선거 때쯤에는 그에 대한 자서전이 12권이나 나왔었고 전쟁영웅으로 인기가 높았었다고 한다. Whig 당은 그를 대통령후보로 내놓았고 인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Van Buren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그는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그는 그 유명한 최장의 취임연설에서 “국립은행을 재건하겠다, 지폐를 발행하고 존중하겠다, 국회를 존중하겠다, Spoils System을 개혁하겠다, staff으로 실력 있는 사람들을 쓰겠으며 veto power를 자제 하겠다” 라는 등 잭슨과 Van Buren 양대에 걸친 실정들을 바로 잡겠음을 약속하였다.
같은 Whig당 소속이었으나 정치적 선배로써 상원을 장악하고 있던 Henry Clay의 빈번한 간섭을 막기 위해 “이제부터는 내가 대통령이오, 잘 기억하시오. 백악관 출입을 금지시킬 수도 있소” 라고 경고한 후 1836년에 대통령 선거 때의 정적이었던 다니엘 웹스터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쇄신적인 인사를 단행하였다.
당시의 여섯 개 행정 부성들을 직접 순시하고 새 장관들을 임명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Spoils System에 익숙해진 구직자들이 백악관의 방마다 가득 차 있어 “대통령 일을 할 수가 없구나” 라고 불평하면서도 그는 최단의 임기 중에 엄청난 제도개혁과 쇄신인사를 단행하였다.
아마 정계와 국민들은 마음이 조마조마 해가면서 그의 초고속 정치운항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1841년 3월 27일 그는 감기로 눕게 되었다. 3월 4일에 취임했으니까 대통령 재임 23일만이었다. 감기는 폐렴으로 이어져서 당시의 모든 의술을 다 동원하였으나 그는 4월4일에 타계하였다.
해리슨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 받은 첫 부통령 Tyler는 사실상 full‐term 을 시무 한 대통령이었다. 국가의 변고로 시작된 그의 대통령 임기도 정치적으로 혼돈스럽고 험난한 것이었다. 그가 애초에 부통령 후보로 뽑힌 것도 대통령 유고시 승계할 가장 적임자인 부통령감으로써가 아니고 조용히 상원의 사회나 맡는 별 볼 일 없는 미국의 전통적인 부통령 후보 자리에 그를 앉혀 놓으면 해리슨의 당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근년에 조지 H. 부시 대통령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인디애나 출신의 Don Quail 상원의원을 부통령후보에 지명했던 적이 있었다. 해리슨은 버지니아주 출신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 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남부 주들의 생각과 정치적 성향이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Tyler를 동반후보로 내놓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Whig당은 판단했던 것이다.
선거의 승리에는 도움을 주었으나 Tyler는 Whig 당이 기대했던 것처럼 ‘약체대통령’이 아니었다. Tyler는 해리슨 못지않은 버지니아 정치명문가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토마스 제퍼슨 과 대학교 때 룸메이트였으며 친구였고, 해리슨대통령 부친과 함께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버지니아주 하원의장, 버지니아주 대법원판사, 주지사를 지낸 후 연방대법원판사를 지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사망한 Tyler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설사를 자주하고 바짝 마른 체구이었다고 한다. 그는 17세에 William and Mary College를 졸업하고 19세 때 변호사가 되었는데 이 연령은 당시의 규정에 위반되는 일이었으나 시험관 판사가 그의 연령을 묻지 않았던 까닭에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주지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첫째부인에게서 8명, 둘째부인에게서 7명의 자녀를 낳아 미국대통령 중에서 가장 자녀가 많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버지니아 주의원, 주지사, 연방하원 의원, 상원의원을 지내고 부통령후보가 되었다. 그는 중앙정부의 점증하는 권한확대를 반대하는 ‘State Rightist; 주의자였는데 이런 정치성향이 남부 주들의 지지를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의 Tyler 는 무조건적인 State Rightist 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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