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에 권력 핵심부로 입성해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을 한국사회에 유행시켰던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그는 지난 2일 청와대 비서실 시무식에서 “그동안 여러 가지 불충한 일들이 있었다”고 비서들을 질타하며 대통령에 대한 무한충성을 강한 어조로 촉구했다. ‘주군’인 대통령에 대한 그의 절대적인 충성심이 유감없이 확인된 자리였다.
김 실장의 이런 충성맹세에 보답하듯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그에 대한 무한신뢰를 드러냈다. 대통령은 “정말 드물게 보는 사심 없는 분”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김기춘 실장에 대한 대통령의 흔들리지 않는 신임이 확인되면서 대폭적인 인적쇄신은 일단 물 건너간 분위기다.
대통령과 김기춘 비서실장의 관계는 맹목적 신뢰와 맹목적 충성으로 엮여 있다. 대통령 신년회견 후 지지율은 취임 후 최저치인 35%까지 떨어졌다. 민심의 요구를 청와대가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니 맹목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김기춘 실장에 대한 세평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매우 명민하다는 평가다. 또 다른 평가는 40년 이상 권력의 양지만을 좇아 왔다는 부정적 시선이다. 명민함이 이런 처세를 뒷받침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윗사람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직언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청와대 내부 인사들에 따르면 김 실장은 지금도 대통령 전화가 걸려오면 사람이 없는 공간을 찾은 후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기를 들고 통화한다고 한다. 누가 보기 때문이 아니라 아주 오래 해왔던, 그냥 몸에 밴 행동일 뿐이다. 김 실장이 자주 사용하는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는 말에서는 그의 의식과 스타일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기춘 실장의 공직생활과 출세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충성’이다. 그는 권력자에 대한 절대 충성과 무한 충성을 발판으로 평생 권력 핵심부에 몸담아 왔다. 전두환 정권에 밉보이는 바람에 한차례 위기는 있었다. 이때도 그는 당시 권력실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 위기를 모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정도면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이라는 DNA가 그의 핏속에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대통령이 김 실장을 ‘정말 드물게 보는’ 믿을 만한 인물로 여기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게 없다. 더구나 아버지 시절 그의 절대적 충성심을 옆에서 지켜봤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공직자의 충성은 죄가 없다. 오히려 치켜세우고 칭찬해야 할 일이다. 국가와 국민을 향한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권력자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래서 정치평론가인 제이콥 와이즈버그는 “충성은 정치 세계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과대평가됐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악덕”이라고 일갈한다. 특히 대통령이 충성꾼들에 둘러싸일 경우 “그런 대통령은 고립될 뿐 아니라 점차 정치를 패거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고 지적한다. 마치 어떤 대통령에 대한 진단처럼 들리지 않는가.
측근들의 충성을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실패의 길을 걸었다. 충성파인 국방장관 맥나마라를 맹목적으로 신임했던 존슨은 베트남전 패배를 맛보았다. 그런 맥나마라를 두고 당시의 저명 언론인 월터 리프맨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대통령에 대한 충성으로 바꿔버렸다”고 비판했다.
주위에 예스맨들만 두었던 닉슨은 워터케이트라는 치욕의 스캔들을 겪었다. 백악관 말년 닉슨은 머릿속에 ‘우리 대 그들’이라는 피해망상적인 구도가 들어앉았을 정도로 심한 강박에 시달렸다. 조지 W 부시 역시 부하들의 충성에 집착했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1970년대의 인연과 경험, 그리고 가치관으로 얽혀 있으니 나라가 갈수록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나이든 충복의 등에 업힌 채 계속 과거로 달리는 대통령이 안타깝다. 대통령은 이제 그 등에서 내려와야 한다. 대통령이 머뭇대거나 주저한다면 김 실장이 먼저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충성된 부하’의 마지막 도리라 할 것이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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