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잭슨의 제2기 대통령 임기동안에 (1832-1836) 집행된 그의 금융과 재정 정책의 실정들의 결과로 경기의 악화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으나 그의 임기 말까지는 아직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었다.
군소지방 은행들의 통화남발과 느슨해진 대부풍조에 힘입어 부동산값은 마구 뛰기 시작하였고 부동산투기가 성행하였으며 사람들은 경기의 호전으로 수입이 늘어나는 것들로 착각하여 국채들을 많이 사들이기도 하였다.
국가회계방식이 엉성했던 탓이었던지는 모르겠으나 “세입의 증대로 흑자잉여금”이 증대하자 잭슨은 이 ‘잉여금’들을 각주 정부들에게 분배하기 시작하였었다.
각 주정부들도 연방정부의 분배금을 포함해서 ‘세입잉여’가 일어나자 도로 등 대규모 시설 간접투자들을 늘여서 겉으로 보기에는 경기호황이 일어나고 있는 듯싶었으나 실은 속빈 강정 같은 일시적인 신기루였다.
1836년쯤에는 부동산투기 거품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은행들의 불실과 파산들에 이르게 되어 부동산뿐만 아니라 일반 공장들에 대한 대출중단으로 이르게 되었으며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자 드디어 도처에서 실직증가로 이어졌다.
곧 연방정부의 세입도 줄어들어 주정부에 보내주던 분배금들이 중단되자 각주정부들은 기왕에 시작해놓은 사회간접투자 사업들을 중단하기 시작하여 이미 시작된 화재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이런 경제상태가 잭슨의 임기가 끝나가는 1836년에 일어나고 있었는데 차기 대통령 Van Buren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1837년에는 경기불황이 더욱 나빠지기 시작하다가 그때 마침 있었던 영국의 경기침체로 미국에 금은이 유입되지 않기 시작하고 미국에 농산물 흉년까지 들자 1839년경에는 미국경제공항이 일어나게까지 되었다.
잭슨이 사방에 뿌려놓은 쓰레기를 치우는데 정신이 없었던 Van Buren은 “나라경제를 망쳐먹은” 대통령이란 의미로 ‘Van Ruin’이란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 그 결과 Van Buren은 1840년의 재선에서 낙선되었고 1848년에 제3당인 Free Soil Party 로 재출마 하였으나 또 낙선하였었다.
National Republican Party라고 불리든 기존의 공화당은 잭슨이 처음 대통령으로 출마할 무렵에는 잭슨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Democratic Republican Party로 분열되기 시작 하였는데 더러 ‘The Democrats’라고 자칭하였던 이들이 훗날 민주당이 된다.
잭슨 대통령 제2차 임기 말쯤 되어서는 분열이 더욱 심해져서 자칭 Whig당이라고 (영국에서 왕의 정책에 반대를 한 여당의 일분파의 선례를 쫓아) 자처하는 사람들이 Van Buren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잭슨의 실정으로 자당후보의 당선에 자신이 없었던 탓이었던지 Whig당은 Van Buren 과 동시에 윌리엄 해리슨이라는 두 후보를 내어 놓았다. 이들의 속셈은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새로 구성되는 하원에서 Whig 당 후보를 하원결선으로 선출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평소 친교술이 능란하고 ‘Peggy Eaton Affairs’에서 보인 수완을 인정받아 잭슨의 제2기 부통령으로 일해오던 Van Buren은 잭슨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인기는 많이 떨어진 대통령이었으나 잭슨의 영향력은 Van Buren을 선거인단 투표에서 다니엘 웹스터 상원의원, 윌리엄 해리슨 장군 등 거물급 후보자 세 명을 따돌리고 대통령 에 당선되게 만들었다.
Van Buren은 미국 대통령 중 몇 가지의 첫 번째를 이룩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미국시민으로 출생한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지금은 헌법에 미국에서 출생 한 미국시민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되어있지만 Van Buren 전의 모든 미국대통령들은 미국이 독립하기 전의 영국시민으로 출생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최초의 뉴욕주 출신 대통령이었고 최초의 화란계 출신 대통령이었다. 그는 집과 동네에서 화란어만을 사용하는 올바니 근처의 화란계 소도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영어가 제 1외국어였다고 한다. 그는 부통령에서 차기 대통령으로 최초로 뽑힌 사람이었는데 그 후 1988년에 레이건 대통령의 부통령 조지 H. 부시 부통령에서 차기 대통령이 된 두 번째 케이스가 되었다.
Van Buren은 친교술이 좋았고 정치적 역량도 많은 사람이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대통령 임기 중에는 잭슨의 뒤치다꺼리로 시달렸어야만 했었다. 그는 자신의 대통령 재임 중에 텍사스가 미국에 합병되는 것을 반대해왔는데 만일 텍사스가 미국에 합병되어 주가 된다면 노예주가 당장 하나 더 늘게 되는 것이고 또 그 엄청난 땅덩어리가 앞으로 많은 수의 작은 주들로 분할될 경우 노예주들이 급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북이 노예제도 문제로 타협할 수 없는 분열 끝에 불과 20여년 후에 남북전쟁까지 하게 되었지만 이미 이때부터 노예제도문제는 미국 정치의 가장 심각한 Political Hot Issue가 되어 있었다.
미국역사상 기록으로 남는 것들 중의 하나는 Van Buren이 연방공무원 들에게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일을 하지 못하도록 법률로 제정한 것이라고 한다. Van Buren 은 때가 맞지 않아 재능을 충분히 발휘해보지 못한 정치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도 몇 가지 ‘첫 번째’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출생 시에는 영국시민이었던 마지막의 미국 대통령이었다. 제23대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의 할아버지인 윌리엄은 68세에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40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할 때까지 최고령의 대통령 취임자였다.
그는 관례대로 추운 겨울날 국회의사당 옥외에서 취임식을 하다가 감기가 걸려 폐렴으로 병세가 악화하여 재임 32일후 사망함으로써 최단명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사망으로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한 첫 번 케이스도 되었다. 승계에는 큰 차질이 없었으나 정책상의 변화가 있어서 정치적 혼선이 뒤따랐다.
대통령 유고시의 부통령 승계문제는 1967년 미국헌법개정25항이 채택되었을 때 까지는 명확한 규정이 없던 허점이었다고 한다. 해리슨은 추운 취임식 날 준비된 마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식장에 가서는 오버코트도 입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로 미국역사상 가장 긴 대통령 취임사를 했다고 한다.
애초에 원고가 너무 길어서 다니엘 웹스터가 줄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8.445 단어나 되는 원고로 장장 두 시간이나 취임연설을 하였다. 그는 취임식이 끝난 후에도 마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축하행렬에 참석하였다. 백악관에 와서도 축하객들 때문에 잠시도 쉬지 못하다가 그날 저녁에 있었던 취임축하파티 세 곳을 들렸다고 한다. ‘Tippecanoe Ball’이란 파티에는 10불씩을 내고 참석한 축하객이 1,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해리슨의 아버지는 대륙의회의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전쟁 중과 후에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내었고 그의 형도 버지니아 연방하원의원을 지낸 버지니아 주의 부유한 대 농장주 정치가문에 그는 태어났다.
본인이 별로 원하지 않았던 University of Pennsylvania 의과대학을 다니던 해리슨은 18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대학을 그만두고 부친의 친구이자 법적후견인이었던 버지니아 주지사의 권고에 따라 미국 육군에 소위로 입대함으로써 오랜 군인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20세 때에 어머니가 별세하면서 수명의 노예들을 포함한 3천 에이커의 농장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으나 군대에 있던 해리슨은 땅을 형에게 팔았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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