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또 성큼 걸어왔다. 지난 12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한항공 간부 임원의 불미스런 행위는 나의 기억창고를 두드려 잊혀진 어느 환자를 생각나게 했다.
작달만한 키에 큰 눈을 가진 젊은 남자가 경찰차로 병원에 실려 왔다. 시카고 컵스 야구 경기장 매표소에서 고함을 지르며 위협적 언행을 계속하자 경찰이 달려 왔고 그의 소지품에서 정신과 진료카드를 발견하고 구치소 대신 정신병원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는 자폐증에다 지능도 낮고 술까지 좋아해 병원 외래진료소에 다니고 있던 환자였다. 장애인 배려 케이스로 취직해 받는 최저임금과 사회보장금으로 사는 그는 푼푼이 돈을 모아 일년에 두번은 꼭 컵스 경기를 보러 갔다. 그게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내가 돈 주고 산 표가 가짜라며 못 들어가게 하잖아요!” 그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술은 안했겠지요?” “조금, 맥주 2병 마셨는데 절대 취하진 안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싸웠죠. 나중엔 돈만 돌려달라고 했는데도 안 된다고 해서…”
알고 본즉 그의 담당 사회복지사가 인터넷을 통해 구매한 티켓이 컴퓨터 오작동으로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서 생긴 일이었다.
절대적 시간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처럼 세상에는 절대적 정의나 완전한 공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벌컥 벌컥 화를 내며 살고 있다.
화를 내게 만드는 가장 흔한 이유는 욕망과 비교 때문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 각자의 고정관념, 편견 그리고 왜곡된 인식에서 화가 생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좀 모자라서 자기를 바보 취급하며 항상 이용하려고 한다는 피해의식과 열등감이 이 환자로 하여금 화를 내게 했던 것이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때의 감정상태가 어떠했는가에 따라 반응이 결정된다. 예를 들어 하루 일을 마치고 2살된 아들을 재운 후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고 하자. 그런데 한 시간도 못 되어서 아이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만약 그날 직장에서 마음 상한 일이 있었다면 “이 녀석은 항상 나를 괴롭히네, 한시도 쉴 여유를 안주니”할 거고, 마침 승진한 날이었다면 “어이고 이제 제 발로 침대에서 나오네”하며 기뻐했을 것이다.
너무 심한 화를 분노(Rage)라 한다. 하찮은 일에 순간적으로 위험하고 발작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정신과에서는 폭발성 성격 소유자로 분류한다. 성질을 가누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사람이나 물건에 손상을 주어 정상적 사회인의 역할을 못하면 정신병의 하나인 간헐적 폭발성 충동장애란 진단을 붙인다. 주로 남성에게 많고 20대 젊은 나이에 발생한다.
출산 중이나 어릴 적에 뇌손상 병력이 있거나 혹은 성장과정에서 순간적 만족감 자제와 관련한 인격형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흔하다.
‘땅콩 회항’당사자는 언론의 뭇매를 맞고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한동안 화의 분출로 스트레스를 좀 풀었으니 이제는 포도주가 익어가듯 서서히 잘못을 용서하는 쪽으로 가야한다.
용서는 힘들다. 용서함은 자기의 자존감이나 의지력을 포기하거나, 타인의 잘못을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해주면 자존감, 의지력이 높아지고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분으로 부터 매일 매일 용서를 받고 있다면 우리 모두 타인의 실수를 용서해 주어야 되는 도덕적 책임도 있는 것이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자신만의 편견과 오만이 마음속에 숨어있어 그렇다. 또한 의지의 행위와 항복의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심리적 기전 때문에 용서하는 순간까지 흔히 용서가 불가능할 것 같이 보인다. 뇌 영상촬영을 해보면 용서를 준비하는 동안 즐거움을 주는 뇌영역이 활성화한다. 진화론적으로도 용서는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화보다 용서가 인간을 오래 생존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의 DNA 속에 공격성과 살해 성향의 유전자는 물론 용서와 동정심의 유전자도 함께 있다.
“내가 누구고, 왜 이 세상에 존재할까?” 각자의 자리에서 타인의 고통을 줄여주고 기쁨을 함께 누리도록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사람, 행복한 지구촌이 되도록 미미한 힘을 보태는 인간이 될 수는 없을까? 새해에는 이런 생각을 틈틈이 하며 철학자가 되어보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남보다 가진 것 많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특히 요구되는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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