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해외로 배출한 최초의 서양화가
▶ 투병 중에 더 뜨거웠던 예술혼 담긴 ‘물’ ‘새’ ‘음악가’ 등 25점 세상에 선봬
화가 안영일
[LA 한국문화원 ‘물의 화가’ 안영일 초대전]
# 23일 오프닝 리셉션… 2월12일까지 전시
“80년 동안 그림만 그리며 살았다. 나와 그림은 이제 분리될 수 없는 것,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나에게 그림은 사랑이고 기도이며, 나를 열고 타인에게로 나가는, 또한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 같은 것이다. 그림은 내게 있어 존재의 표현이고 이유이며, 소통이고 해방이다. 화가로 살기 때문에 겪는 고통과 어려움도 많았으나 화가가 아니었으면 못 느꼈을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과 감성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 삶을 깊게 하고 넓게 해준 것을 기쁨으로 생각한다”
‘침묵의 화가’ 안영일(사진)의 이 고백을 듣기까지 오래 걸렸다. 수년 전 뇌졸중으로 투병하면서 더 말이 없어진 안 화백이 초대전을 앞두고 밝힌 소감, 작가의 고된 삶을 간결하게 함축한 소회다.
2015년 LA 한국문화원(원장 김영산)이 여는 첫 전시 ‘안영일: 물과 빛의 변주곡’은 특별한 감회와 기대가 쏟아지는 기획전이다. 한달전 데스크 칼럼(12월19일자 ‘화가 안영일’)에서도 썼지만 한국미술계가 해외로 배출한 최초의 서양화가를 뒤늦게나마 조명하는 회고전이요, 반세기 넘게 캘리포니아의 태양과 바다를 캔버스에 담아온 예술가의 혼과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전이다.
이 전시에서 안 화백은 30년 넘게 집중해온 ‘물’(Water) 시리즈를 중심으로 ‘새’(Bird), ‘우산’(Umbrella), ‘음악가’(Musicians), ‘해변에서’(At the Beach) 등 반추상 연작 25점을 선보인다. 하나하나 모두 장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역작이지만 안영일 하면 ‘물의 화가’인 만큼 대작 포함 10여점의 ‘물’ 시리즈가 전시장을 압도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30년간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작품에 대해 쓰기가 참 쉽지 않다. 사실 나는 이 화가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잃은 사람이다. 너무 많이 알아서도 힘들지만, 너무 오래, 많이 마음이 아팠어서 더 어려운 것이다. 특별히 ‘물’, 안영일의 거대한 ‘물’ 앞에 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흰색, 회색, 빨강, 파랑, 초록, 보라, 검정… 어떤 색의 ‘물’에서도 안영일의 숨겨진 삶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물’은 안 화백이 가장 어렵던 시절, 10년을 하루같이 바다낚시하러 나가 시름을 달랬던 고난 속에 태어난 연작이다. 촘촘한 물의 입자들. 그 속에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낮, 광대한 바다, 내리쬐는 태양, 그 침묵의 무한공간에서 물과 공기와 빛의 입자가 춤추며 빚어내는 색채의 유희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물’에는 그 많은 시간 가졌던 끝없는 명상과 자신과의 대화가 수많은 겹이 되어 켜켜이 숨어 있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태양으로부터 쏟아져 내려 대양에 도달한 광선은 넘실대는 물의 무수한 입자들이 프리즘을 거쳐 나오면서 각가지 색깔로 분해되고 또 반사하며 때로는 영롱하게, 때로는 은은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움직이는 공기와 소리, 그리고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서 변해가는 빛과 광선들, 그것은 단 한 순간도 ‘정지’가 없고 ‘같음’도 없이 ‘재탄생’하고 ‘변화’해가는 그러면서도 영원한 것, 우주의 몸짓과 같은 것이다”‘물’ 시리즈에서 또 하나 특별한 것은 동양계 화가에게선 흔치 않은 팔레트나이프 기법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팔레트나이프로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에 가장 익숙한 기법이라는 안 화백은 “끝없이 같은 동작으로 반복되는 팔레트나이프 기법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닷물의 리듬과 박자, 그리고 빛이 물의 프리즘을 통해서 순간순간 변하는 입체적인 색채의 율동을 표현하기에 가장 정확하고 적절하다”고 설명한다.
작고 가는 것부터 아주 크고 굵은 것까지 여러 사이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의 팔레트나이프 테크닉은 주류화단에서도 경탄할 정도로 세밀하고 대담해서 이 기법에서는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된다. 특히 ‘음악가’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팔레트나이프 기법은 그 굵은 선과 대담한 구성이 보는 사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음악은 미술 다음으로 그를 사로잡는 주제로 안 화백은 “그림 그리는 틈틈이 피아노를 치고 클라리넷을 불고 첼로를 켜면서 그 아름다운 음색에 한없이 매료되었고, 내 온몸에 퍼지는 감흥을 캔버스에 담았다”고 설명한다. 연주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아주 굵은 팔레트나이프로만 표현하는 굵고 힘찬 작업은 80년 화력의 안 화백만이 구사할 수 있는 특유의 기법으로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특별한 그림은 어쩌면 ‘새’ 시리즈인지도 모른다. 처음 미국에 와서 베벌리힐스의 재커리 웰러 화랑의 전속화가가 되었을 때 미국인 고객들은 안영일의 새 그림에 ‘미쳐서’ 그려 내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지금도 컬렉터들이 가장 먼저 잡는 작품이 ‘새’이고, 한인들도 ‘새’를 보면 무조건 좋아한다.
안영일의 ‘새’에는 무엇이 있기에 사람들을 매혹시킬까? 그림에 진짜 새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그 새의 희망과 자유와 비상의 노래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의 스튜디오에 가보면 언제나 새장 속에서 노래하는 앵무새를 볼 수 있는데, 그림에서는 그 퍼덕임뿐만 아니라 지저귐까지 들려온다. 그것은 사랑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최희선 LA 한국문화원 큐레이터는 “얼마 전 블럼 앤 포(Blum & Poe) 갤러리에서 한국의 유명 원로작가들을 초청한 단색화전이 열렸을 때 안영일 선생님이 떠올랐다”고 말하고 “한국의 숨은 보석을 찾아내 세상에 다시 드러나게 하는 일이야말로 한국문화 홍보 일선에 있는 문화원의 역할이라고 생각돼 전시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긴 공백 끝에 작품을 발표하게 돼 말할 수 없이 기쁘다는 안 화백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한다. “나이가 80이다보니 이제 정리할 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아직도 작품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고, 못다 그린 그림이 많습니다. 아직도 아름다움 앞에선 소년의 감성과 설렘이 있습니다”한국문화원 전시 오프닝 리셉션은 23일 오후 7시.
5505 Wilshire Blvd. LA, CA 90036 (323)936-3014(최희선)안영일 화백은 2월19일부터 4월12일까지 롱비치 미술관(Long Beach Museum of Art)에서도 특별 초대전을 갖는다.
<정숙희 기자>
■ 화가 안영일은
화가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4세 때부터 세잔의 화집을 모작했던 신동으로, 6세 때 일본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중학교 때 국전에 특선했다. 서울 미대를 졸업하던 1957년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 초대로 미국서 첫 전시를 가졌고 1966년 도미, 베벌리힐스 화랑가에서 20년간 왕성하게 활동했다. 25회의 개인전과 수많은 그룹전, 아트페어에 참가했으며, 한인화가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연방 국무부의 ‘미술대사’로 위촉돼 2002-200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소재 미대사관저에 작품이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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