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꼭 64년 전인 1950년 12월 벌어진 ‘흥남 철수 작전’은 한국전은 물론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다. 중공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10만 명의 미군과 10만 명의 피난민, 1만7,000여대의 차량과 35만 톤의 무기를 안전하게 부산까지 실어 나른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민간인 고문 현봉학의 호소에 힘입어 메레디스 빅토리 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가 이미 선적한 무기들을 모두 내리고 피난민을 태운 것은 절박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나라는 물자가 풍부하고 인명을 존중할 줄 아는 미국뿐일 것이다. 만약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나 김일성 치하의 북한군 장교가 이런 결정을 내렸더라면 본인은 물론이고 부하들과 그 일가족은 모조리 이적죄로 총살됐을 것이다.
이날 메레디스 빅토리 호에 탄 피난민 1만4,000여 명은 한 배에 탄 인원으로는 세계 최고로 아직까지 기네스북에 기록돼 있다. 피난민 가운데 임산부도 많았는지 부산까지 내려오는 도중에만 5명의 아기가 배 안에서 태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극적인 사건이 최근까지 제대로 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6.25와 함께 부산에서 태어난 ‘국제시장’을 소재로 한 영화 ‘국제시장’이 올 연말 한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 영화 시작 장면이 바로 흥남 철수다.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개봉 열흘 만에 벌써 400만 관객을 동원하는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1,000만 돌파는 시간문제로 보인다.
6.25 직후 한국의 가난과 서독 광부 파견, 월남전 참전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 시대를 살던 한국의 아버지들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담담히 보여주는 이 영화가 이처럼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동안 별 주목도 인정도 받지 못했던 한국의 아버지 세대가 이를 통해 그나마 위안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방 직후 아프리카 수준의 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이 지금 무역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그 자체가 한 편의 장엄한 드라마다. 그럼에도 이를 제대로 다룬 영화한 편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좌편향일색의 한국 영화 풍토를 감안하면 지금이라도 이런 영화가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윤제균 감독은 정치색을 빼고 한국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고 말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좌파 평론가들은 ‘역사를 보는 시각이 너무 평면적’이라느니 ‘과거를 미화했다’느니 하며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국의 좌파가 산업화의 성공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것이 ‘친일 독재의 화신’ 박정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때문이다. 산업화가 한국민이 이룬 위대한 업적임을 인정하면 이를 주도한박정희에게도 약간의 찬사를 보내야하는데 이는 죽기보다 싫은 것이다. 이들에게 박정희는 오직 장기 집권을 하며 인권을 짓밟은 독재자일 뿐이다.
이들의 이런 생각이 한국에서 ‘진보 정당’이 1~2%의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평소에는 민중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척 하지만 박정희에 관해서만은 예외다. 지난 수십년간 여론 조사 결과는 일관되게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박정희를 꼽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이런 결과가 한국 민중이 아직도 무지몽매하기 때문으로 굳게 믿고있다. 이들은 배고픈 사람에게 정말 절실한 것은 무엇보다 한 조각의 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돋보이는 것은 주인공 덕수의 친구로 나온 오달수다.
그의 코믹한 연기도 일품이지만 한국의 민주화를 대표하는 영화 ‘변호인’에서도 인권 변호사의 사무장으로 나왔던 그는 이로써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역사적 인물이 됐다.
길고도 암울했던 박정희 독재시절 목숨을 내걸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의 노고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그 와중에 독재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에 대한 아픔과 독재자에 대한 분노 속에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한국 역사를 바라보는데 실패하고 있다. ‘박정희 컴플렉스’에 대한 극복 없이 한국 사회의 이념적 화해도, 진보의 집권도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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