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왔을 때 자동차 여행을 자주 했었다. 동부에 살면서 남쪽에 사는 친지들을 방문하곤 했다. 대륙의 고속도로는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지평선까지 아득하게 뻗어있는 고속도로 양편으로 거칠 것 없이 마구 자란 나무들이 이어졌다. 햇빛 물 양분 모두 풍성해서 성장을 억제할 필요가 없는 조건, 나무들은 마음껏 뻗고 자라서 크고 거칠었다. 내면의 욕망을 저렇게 거침없이 뿜어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절제와 억제가 미덕이던 작은 나라, 우리 고국의 억눌려진 욕망들이 떠올랐다.
대한항공 조현아(40) 전 부사장 사건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조씨의 항공법 및 항공보안법 위반, 월권에 의한 업무방해 등의 혐의를 둘러싸고 검찰 수사와 국토교통부 조사가 진행 중이다. 검찰은 대한항공 본사를 압수수색하고 조씨를 출국금지 했다. 검찰의 수사의지는 단단해 보인다. 재벌가 2세 3세의 오만방자함이 처음이 아니고 그때마다 정서적으로 상처 입었던 국민들이 이번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탓이다.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기미를 보이자 이제껏 숨죽이고 있던 사무장도 입을 열었다. 조 부사장 앞에서 무릎 꿇린 채 욕설과 폭행을 당했다는 그는 “이런 모욕감과 인간적 치욕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다.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딸의 어리석은 행동을 용서해 달라”며 고개를 숙였고, 조씨 본인도 취재진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평생 꼿꼿하게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살았을 조현아씨를 보며 거칠 것 없이 마구 자라던 남부의 나무들을 생각했다. 무엇이든 넘치게 많아서 한 점 결핍을 몰랐을 삶의 조건, 욕망도 감정도 삼가거나 절제하는 법을 그는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 있다. 교만이라는 병이다. 웬만큼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고는 면역력을 갖기 어려운 병이다. 가장 치명적인 증상은 눈이 머는 것. 자만심이 눈을 가려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너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눈이 멀면 따라오는 것은 추락. 인간이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게 굴다가 신의 심판을 받는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의 단골 소재이다. 대표적인 주인공이 니오베이다.
니오베는 리디아의 왕 탄탈로스의 딸이자 테베 왕 암피온의 부인이다. 테베에서는 매년 여신 레토를 기리는 축제가 열리는 데, 니오베가 생각해보니 자신이 레토보다 못할게 없었다. 테베의 왕비로 권력을 가진 데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내 소유, 미모 또한 여신과 다름없다. 게다가 나는 아들 일곱에 딸 일곱을 두었다. 아이가 둘뿐인 레토가 나보다 나을 게 무언가.” 하며 백성들에게 제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레토는 진노하고 아폴로와 아르테미스 남매는 어머니를 모욕한 니오베 응징에 나섰다. 먼저 아폴로가 활을 쏘아 니오베의 아들 7명을 죽이자 암피온 왕이 충격에 자살하고, 이어 아르테미스가 활로 딸 7명을 또 죽였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니오베는 슬픔에 온몸이 굳어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서는 오늘도 물이 흐른다고 한다. 니오베의 눈물이다.
니오베의 교만, 신의 영역을 넘볼 만큼 주제넘은 교만을 휴브리스라고 한다. 오만방자함으로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이다. 조 전 부사장이 저지른 것 같은 잘못이다.
연말이 되니 ‘슬픈’ 선행 소식들이 또 들린다. 절제와 억제로 평생을 살아온 분들이 안 먹고 안 입으며 모은 목숨 같은 돈을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내놓는 선행이다. 시장 좌판에서 나물 팔던 할머니, 김밥 팔던 할머니들의 기부는 너무 거룩해서 슬프고, 슬퍼서 속이 상한다. 제발 기부하지 마시고 당신 여생을 편히 사시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단 하나 억제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기부라면 그분들은 마땅히 그 욕망을 충족시킬 권리가 있다.
지난 8일에는 부산에서 85세의 독거노인이 전 재산 3500만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6.25때 총상을 입어 장애가 있는 그 할아버지는 평생 독신으로 노점을 하며 살았는데, 생필품 외에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아 그만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나” 싶은 생각에 돈을 기부하기로 했다고 하자 구청의 담당 여직원은 20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통장에 입금하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나머지 1500만원은 “맛있는 거 사드시며 갖고 계시다가 나중에 또 기부하시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마음도 아름답고 구청 직원의 마음도 아름답다.
사람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야 하는데 높이 올라가고 많이 가질수록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슬프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 막는 것, 교만이라는 병이 원인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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