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배권 장악한 수컷, 전임자 새끼들 모조리 살해
▶ 260종의 포유동물 중 무려 45% 이상에서 나타나
■ 개코원숭이를 통해서 본 놀라운 사실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사라 블래퍼 허디는 개코원숭이 연구를 위해 1970년대 초 인도로 건너갔다. 당시 그녀는 하버드 대학 대학원생이었다. 개코원숭이는 여러 마리의 암컷이 한 마리의 수컷과 무리를 이루어 생활한다. 인간의 혼인 습속으로 바꿔 말하면 일부다처제인 셈이다. 이들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블래퍼는 외부의 젊은 도전자가 쳐들어와 무리의 우두머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집단생활을 하는 야생동물들 가운데 흔하게 나타나는‘알파 수컷’의 교체다.
새로운 ‘왕’의 등극은 피 튀기는 유혈극을 동반하기 일쑤였다. 자리를 지키려는 쪽과 빼앗으려는 쪽은 목숨을 건 힘겨루기를 벌였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참극은 새로운 강자가 무리를 장악한 후에 이루어졌다.
그룹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된 개코원숭이는 축출된 전임자의 어린 새끼들을 가차 없이 살해했다.
허디 박사가 인도로 들어가기 전에도 무리 안의 남의 새끼를 죽이는 포유류 수컷에 관한 보고서가 여러 건 나왔지만 과학자들은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1974년 허디 박사가 개코원숭이 수컷의 ‘유아살해’가 진화의 산물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그룹의 새로운 리더로 떠오른 개코원숭이는 다른 수컷에 의해 태어난 자식들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의 핏줄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높이게 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후일 UC데이비스의 교수가 된 허디 박사는 자신의 연구를 확대했고 이같은 유아살해가 포유류의 공통된 특징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녀의 연구 결과에 자극을 받은 과학자들은 다투어 포유류 수백 종의 행동에 관한 관찰을 시작했고, 이 덕분에 상당한 분량의 관련 문서가 작성됐다.
허디 박사의 첫 제안이 나온 때로부터 40년이 지난 뒤 캠브리지 대학의 진화 생물학자 2명이 포유류 전체를 대상으로 새끼 살해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에 관한 본격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이달 ‘사이언스’지에 게재된 논문에서 이들은 유아살해를 부추기는 특정 조건이 존재한다는 허디 박사의 주장을 재확인했다.
디터 루카스와 엘리스 허처드 박사는 260종의 포유류에 관한 학술보고서를 샅샅이 뒤져 광범위한 포유동물들이 새끼살해의 증거를 추적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260종의 포유동물 중 45%가 넘는 119종이 다른 수컷의 새끼들을 죽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루카스 박사와 허처드 박사는 포유동물이 진화를 거듭해온 지난 1억6,000만년 동안 유아살해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살피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현존하는 포유류의 공통 조상은 다른 수컷에 의해 태어난 자식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유아살해는 진화과정에서 별개의 종으로 분리된 후 상당수의 포유류 사이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다.
루카스 박사와 허처드 박사는 방대한 자료 분석을 통해 다른 수컷의 자식을 죽이는 포유동물들이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암컷이 1년에 단 한 번밖에 출산을 하지 않는 포유동물의 경우 새로이 지배권을 장악한 수컷은 축출된 우두머리의 어린 새끼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 사자처럼 무리를 구성하는 암컷의 수가 수컷의 수를 크게 웃도는 동물 집단에서는 거의 틀림없이 전 리더의 새끼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포유동물의 새끼살해를 부추기는 특정한 조건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만약 소수의 수컷만이 암컷과 교미할 수 있다면 ‘자격 미달’인 나머지 수컷들은 무자식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자연선택’은 종의 번식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늘 힘센 강자를 선호한다.
하지만 그룹 내 암컷들을 독차지하는 우두머리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 더 힘센 도전자가 나타나 자신을 몰아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통치기간에 되도록 많은 암컷과 교미를 해 든든한 후사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암컷들은 전 주인의 자식들을 건사하느라 바빠 새로운 리더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다.
이 열 받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은 딱 한 가지. 이전 우두머리 수컷의 자식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 암컷들을 양육의 부담에서 풀어놓아야 한다. 남의 새끼를 처치하고 달리 할 일이 없어진 암컷들과의 왕성한 짝짓기를 통해 ‘내 씨’를 퍼뜨리는 ‘일조이석’의 묘수다.
물론 이런 시나리오는 암컷이 연중 어느 때나 출산이 가능한 군거동물의 경우로 제한된다.
만약 암컷이 1년에 딱 한 번만 출산을 한다면 신임 실력자는 굳이 남의 새끼를 죽일 필요가 없다. 어차피 암컷의 다음 출산기까지 기다려야 하니 전해에 태어난 전임자의 새끼를 죽여 봤자 득 될 게 없다.
허디 박사를 비롯, 포유류 새끼살해를 연구한 초창기 과학자들은 자식을 무사히 지키기 위해 일부 포유동물의 암컷들이 일부러 몸을 헤프게 굴리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루카스 박사와 허처드 박사 역시 이 같은 진화론에 동조한다. 실제로 이들은 유아를 살해하는 것으로 나타난 일부 종들의 암컷이 그룹 내의 수컷들과 두루 교미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난교를 통해 어미들은 짝짓기의 독과점 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힘센 수컷으로 하여금 어느 놈이 자신의 친자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아무리 동물이라도 아비는 아비인지, 수컷은 행여 자신의 새끼를 해칠세라 쉽사리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는 성적 행동의 진화에 해당한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 영장류 연구 권위자인 카렐 P. 반 샤이크 교수는 새끼를 살해하는 포유동물의 종은 이제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적행동의 진화에서 보듯 새끼를 지키려는 암컷의 방어 메커니즘이 굳건히 자리를 잡은 탓에 유아살해 행동이 좀처럼 밖으로 노출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와 함께 유아살해를 막으려는 방어 메커니즘이 일부 종들의 사회적 구조를 바꾸어 놓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영장류 학자인 킷 오피 박사는 암컷과 수컷이 한 쌍을 이뤄 고정 파트너로 생활하는 일부 영장류의 단혼 습성은 새끼살해를 막기 위한 방어 메커니즘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인간의 단혼제도 역시 이런 방향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뉴욕타임스 본사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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