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다음날인 28일, 넷플릭스는 특선 프로그램을 내보낼 예정이었다.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음껏 먹고 신나게 떠들며 가족 간의 정을 만끽하는 시간. 가족의 축제인 추수감사 절기에 딱 들어맞을 특집을 넷플릭스는 일찌감치 준비해 두고 있었다. 미국의 ‘국민 아버지’ 빌 코스비 특집이었다. 원로 연예인 빌 코스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77회 생일날 녹화하며 공들여 만든 이 프로그램을 넷플릭스는 ‘연기한다’고 며칠 전 발표했다. 빌 코스비 신상에 ‘변고’가 생긴 것이었다.
1980년대 미국인들에게 코스비만큼 친근한 연예인도 없었다. 인기최고의 가족시트콤 ‘코스비 쇼’에서 그는 자상하고 재미있고 따뜻한 아빠였고, 화면의 이미지는 그대로 그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당시 한인들도 대부분 ‘코스비 쇼’를 즐겨보며 흑인들의 문화와 흑인 가정의 분위기를 이해했다.
코스비는 이미지에 민감했다. 1960년대 코미디언으로 성공하며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흑인 슬랭이나 성적 조크들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활동무대를 주류사회로 넓히려면 평판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후 수십년 그는 모범 가장, 모범 아버지 모습으로 연기하고, 책을 쓰고, 광고에 출연하면서, 가장 존경하고 신뢰할 만한 연예인 10위 안에 단골로 꼽히곤 했다.
그에게 ‘변고’가 생긴 것은 지난달이었다. 완벽했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가 배우로서 쓰고 있던 가면 뒤에 어린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짐승’이 숨어있었다는 주장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다시 퍼 담을 수 없을 만큼 기정사실화했다.
멀게는 40년 가깝게는 10년 전 코스비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이 현재까지 15명. 사건당시 배우 지망생, 모델 등 다양한데, 이들의 주장은 모두 비슷하다. 코스비가 술에 약을 타서 먹인 후 성폭행했다는 것이다.
코스비가 성폭행 의혹에 휘말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5년 한 여성이 그를 성폭행 혐의로 고발하면서 잠깐 뉴스를 탔다. 하지만 양측이 법정 밖 합의를 하면서 의혹은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그가 나이들어 대중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것도 의혹을 자연스럽게 묻히게 했다.
매스컴들이 올해 갑자기 관심을 보인 것이 그에게는 호사다마였다. NBC, 넷플릭스 등이 코스비 출연 새 프로그램 제작을 발표하고, 그의 전기가 출간되는 등 그는 때 아닌 전성기를 맞는 듯 했다. 한껏 높아진 관심의 틈을 비집고 해묵은 의혹이 다시 터져 나왔다.
지난달 16일 한 코미디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공연 중 “국민 아버지, 코스비? 그는 강간범!”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온라인을 타고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어 피해 여성들이 속속 방송에 출연해 ‘코스비 성폭행’을 폭로했고, 방송사들은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들을 줄줄이 취소했다. ‘국민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추악한 강간범으로 바뀌었다.
1985년 17살 때 성폭행 당했다는 한 여성은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사람들은 왜 내 말을 30년이나 지나서야 믿어 주느냐?”고 분개했다. 그가 성폭행 당했을 때 코스비의 스탭들이 알았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않았고,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말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며, 변호사를 찾아가 말하니 ‘꾸며낸 얘기’라고 일축했었다는 것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남성 주변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힘있는 남성이 힘을 앞세워 여성을 성희롱·폭행하는 것은 끊임없이 있어왔던 일이다. 특히 연예계에서 심해서, 한국에서는 여자 연예인이 ‘성 상납’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불이익을 당할 까봐, 보복이 두려워서, 혹시라도 도움을 받을까 하는 기대로 … 폭력을 참고 사는 여성들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코스비의 추락은 우연이 아니다.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에서 별 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던 성희롱, 성폭력이 더 이상 묵과되지 않을 만큼 세상이 바뀌고 있다. 위의 피해 여성이 말한 30년 동안 여성들의 의식이 바뀌었고, 목소리가 커졌으며, SNS라는 편리한 ‘마이크’도 손에 쥐어졌다.
성폭력은 성욕이 아니라 폭력의 문제이다. 그런 폭력은 피해자의 영혼에 너무 깊은 상처를 남겨서 수십년 지나도 기어이 가해자를 심판대에 세우게 한다는 사실을 코스비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그의 추락을 보면서 눈먼 성폭력자들이 눈을 뜬다면 코스비로서는 마지막 ‘국민 아버지’ 역할이 될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