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 연방 공휴일인 독립기념일은 한국의 대표적 법정 공휴일인 광복절에 딱 들어맞는다. 마찬가지로 메모리얼 데이는 현충일, 추수감사절은 추석에 해당한다. 그런데 콜럼버스 데이는 엉뚱하게 한글날과 닮았다. 콜럼버스를 감히 세종대왕에 비유하려는 게 아니다. 시기가 비슷하다는 것도 아니다. 둘 다 오래 동안 폐지위기를 겪어왔다는 얘기다.
한글날은 경제발전을 위해 공휴일을 줄이자는 취지로 1991년 폐지됐다가 2005년 쉬지 않는 국경일이 된 후 22년만인지난해 공휴일로 복원됐다. 잘된 일이다.
하지만 콜럼버스 데이는 다르다. 해마다 이맘때면 원주민(인디언)부족을 비롯해 인권단체, 사회단체, 언론 등으로부터 몰매를 맞는다. 아예 공휴일 명칭을 바꾸는 도시와 기관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주 시애틀시의회가 그랬다. 콜럼버스 데이인 10월 둘째 월요일을 ‘ Indig-enous Peoples’ Day’ (토착민의 날)로 지정한다는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고,방청석을 가득 메운 원주민들이 환호성을 올렸다. 지난 2007년 워싱턴 주 의회가 전국최초로 1월13일을 ‘ 한인의 날’로 지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한 한인들의 판박이였다.
시애틀교육구도 시의회에 앞서 지난주콜럼버스 데이를 올해부터 ‘ 토착민의 날’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콜럼버스 데이는 워싱턴주와 시애틀시에선 원래 공휴일이 아니다. ‘ 토착민의 날’로 바뀌어도 지방정부 기관과 학교는 그날 문을 연다. 하지만 도시이름을 원주민추장 ‘ 시앨스’ 에서 딴 시애틀이 콜럼버스 데이 명칭을 바꾼 건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다.
버클리(캘리포니아)는 이미 1992년에, 미네아폴리스는 금년 초에 콜럼버스 데이를 ‘ 토착민의 날’로 바꿨다. 사우스다코타에선 1989년부터 ‘ 토착 미국인의날’이 됐고, 앨라배마에선 ‘ 콜럼버스 데이-원주민 문화유산의 날’로, 하와이와 바하마에선 ‘ 발견의 날’로 불린다. 워싱턴주 외에 오리건, 알래스카, 하와이, 사우스다코타가 이날을 공휴일로 인정하지 않는다.
콜럼버스 데이는 1792년 뉴욕에서 처음 경축됐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했다는 10월12일이었다. 꼭 100년 후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이 콜럼버스 항해 400주년을 맞아 국민에게 ‘ 애국적 축제’를 벌이도록 독려했고, 1937년엔 프랭클린 루즈벨트대통령이 10월12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지난 1971년 날짜가 10월 둘째 월요일로 조정돼 연휴가 됐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미국과 관계없는 사람이다. 그가 발견했다는 신대륙에는 이미 수백만명의 원주민이 수천년 전부터 살고 있었다. 스페인 왕의 지원을 받아 1492년산타 마리아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 그는 미국엔 발도 들여놓지 못했고 아이티를 비롯한 카리브 섬들을 공략했다. 수많은 토착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먹은 인종말살 범죄의 원조였다.
미국은 콜럼버스보다 차라리 아메리고와 가깝다. ‘ America’라는 국가명이 그에게서 연유됐기 때문이다. 역시 이탈리아인 아메리고는 남미 대륙을 처음 ‘ 발견’했고, 1507년 유럽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에 아메리카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 아메리고는 라틴어로 아메리쿠스이다. 당시 지명 제정의 관행에 따라 여성형인 아메리카(유로파, 아시아, 아프리카)가 됐다.
날이 갈수록 ‘ 왕따’ 당하는 콜럼버스데이를 이탈리아 커뮤니티가 수수방관할 리 없다. 로마 가톨릭의 후광이 200여년 전만 못해도 나름 권토중래를 노린다. 토착민의 날이 콜럼버스 데이와 겹쳐야 할 이유가 없다며 세인트 패트릭tm데이가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문화유산을 기리듯이 콜럼버스 데이도 이탈리아이민자들의 축제일로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웅과 악마의 두 얼굴을 가진 콜럼버스는 기념일이 아니어도 이미 미국의 일부가 됐다. 수도인 워싱턴 DC(콜럼비아 구역)까지 그의 이름을 땄다. 기념일이 꼭 축제일인 것도 아니다. 워싱턴주가 한인의 날에 앞서 1978년 역시 전국최초로 제정한‘ 일본인의 날’ (2월19일)은 축제일이 아니다. 제2차 대전 중 강제 수용당한 12만 일본계 시민을 ‘ 기억’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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