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의 금년 새 회기는 ‘역사적’ 한 획을 그을 수도 있었다. 상당수 전문가들도 ‘동성결혼에 대한 합헌성을 명시하는 최종 판결’로 존 로버츠 대법원의 대표적 유산이 탄생하는 회기가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3년에 이어 금년에도 동성결혼 자체에 대한 합헌여부 판정을 유보했다. 5개주의 동성결혼금지법 관련소송 모두를 심리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예상을 뒤엎은 깜짝 발표에 매년 10월의 첫 월요일, 조용하게 시작되었던 대법원의 개정 첫날이 금년엔 전국 미디어의 각광 속에 제법 소란스러웠다. 각 주의 동성결혼 금지법에 대한 항소법원들의 위헌판결이 그대로 유지되니 사실상으로는 동성결혼의 합법화다. 미 전체 중 절반이 넘는 30여개 주에서 동성결혼이 허용된다는 의미다. 10년 전만 해도 매사추세츠 주 한 곳에서만 가능했었으니 정말 놀랄만한 변화다.
그것도 대법원의 역사적 판결이 아닌, 이른바 ‘무대응으로 대응(non-action action)’하여 나타난 변화인데 당사자인 9명 대법관은 유보의 배경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니 갖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보수파들은 ‘동성결혼 위헌’ 판정을 내리기 위해 대통령이 바뀌어 보수성향 새 대법관이 증원될 후까지 미루기를 원했고, 여론보다 너무 앞서가기 원치 않는 진보파들은 세월과 함께 동성결혼 이슈가 지루할 만큼 일상적 이슈가 될 때가지 미루기를 원했을 것이며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역사의 그릇된 쪽에 서기도, 진보파와 합세하기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뉴요커는 추정 분석했다.
대법원 스스로도 ‘무대응’에 의한 판정 유보로 함정에 빠졌다고 USA투데이는 지적한다. 동성결혼을 더 이상 추상적 이슈로 다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이 언젠가 최종판결을 내릴 때 쯤이면 이미 수백만 동성애자들은 결혼을 하고 자녀도 가졌을 것이다. 어느 대법관이 수백만 미국인 가족에게 생이별의 깊은 상처를 주는 동성결혼 금지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는가.
세심하게 계획된 ‘무대응’으로, 진보진영에 실질적인 승리를 안겨주며 시작되긴 했지만 대법원의 금년 회기에서 더 이상 진보의 승리 전망은 밝은 편이 아니다.
로버츠 대법원장 취임 10년째를 맞는 대법원의 이번 회기엔 동성결혼 말고도 뜨거운 화두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대법원의 보수 5인조’가 얼마나 강경 대응할 지 지켜볼만하다.
동성결혼이 진보진영에 가장 중요했던 케이스라면 보수진영이 촉각을 세우는 이슈는 오바마케어 재공략이다. 주 정부가 아닌 연방정부 보험거래소에서 보험을 산 가입자에게도 택스 크레딧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소송으로 수백만명 오바마케어 가입자가 받는 정부보조비를 겨냥하고 있다. 오바마케어를 대폭 약화시킬 잠재력을 가진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
논쟁이 그치지 않는 낙태도 텍사스와 애리조나주 케이스로 올라와 있다. 20여년 전 “각 주는 낙태시술을 규제 할 수 있으나 임신중절을 원하는 여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어선 안될 것”이라는 대법원 판결에 의거, 각 주가 규제법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낙태를 제한할 수 있는지, 이에 따라 여성의 선택권이 훼손당하는 것은 아닌지 또 한 번의 판가름이 나올 것이다.
매년 연방대법원에 상고되는 케이스는 약7,500건에 달하는데 그중 채택되는 것은 70여건 정도다. 이번 회기엔 약 50건, 컬러풀하고 흥미로운 케이스들도 적지 않다.
물고기와 서류는 법적으로 동등한가. 아직 어린 물고기를 잡다가 적발된 선장이 조사를 받기 전 물고기를 바다에 버린 것은 기업에서 “고의로 서류를 파기해” 증거인멸을 꾀한 것과 같은 사법방해 범죄에 해당하는가. 대법원은 연방법의 ‘과잉처벌’ 여부를 가릴 것이다.
무슬림 복역수는 교도소 규칙에 반해 수염을 기를 권리가 있는가. 페이스북에 전처를 죽이는 방법 등 위협적 내용을 올린 것은 범죄인가, 표현의 자유인가. 회사는 임신한 여직원에게도 일시적 장애를 당한 직원들처럼 편의를 제공해 주어야 하는가.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의 여권에 출생지를 ‘예루살렘, 이스라엘’로 표기해달라는 요구를 국무부는 들어주어야 하는가…동성결혼 판결 등이 대법원 내 보수 대 진보의 이념대립을 뜻한다면 이런 케이스들은 법의 모호한 영역에 대한 대법관들의 명쾌한 해석이 요구되는 사안이다.
지난 10년 확실하게 보수화된 대법원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교육과 고용에서 인종 근거 우대정책에 반대를 표하며 민권법 약화를 선도했고 지난 반세기 동안 가장 친기업적 대법원으로 정착시켰지만, 보수진영에서 ‘배신자’로 비난받으며 오바마케어의 합헌판결을 끌어낸 것도 로버츠였다.
진보의 눈에 비친 로버츠는 ‘법 앞에 평등한 정의’를 지켜가는 ‘겸허한 법정’을 강조했던 상원 인준청문회에서의 약속과는 달리 “극적인 우경화를 위해 법원의 권한을 휘두르는 보수의 수장”이다. 그러나 “주요 이슈에서 결단을 꺼리며 우파 승리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로버츠는 강경보수에게도 성에 차지 않는 대법원장이다.
최연소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존 로버츠의 대법원은 종신제에 의해 오래 장수할 것이 틀림없다. 그가 지난 10년처럼 앞으로도 진화(evolve)가 아닌 퇴화(regress)를 계속하면서 미국의 사회정의 실현도 함께 뒷걸음질 칠까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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