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필자는 얼마 전 미국사람들이 미국 대통령 중 서너 분을 주저 없이 성인화 해오고 있는데 그중에 Thomas Jefferson 대통령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고 쓴 적이 있다. “미국역사”에 언급되는 모든 분들에 대한 논평은 전부 조심스러워야 하지만 그중에서도 Jefferson 대통령에 대한 논평을 쓰기는 더욱 어렵다고 느껴진다. 그분은 성품이 원통처럼 원체 다원적인 분이라서 그분의 인품의 크기를 다 알지 못하는 필자 같은 사람의 미숙한 논평은 그분의 깊이를 독자들에게 잘못 전할수가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께서도 어릴 적이나 성숙해오던 과정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떠올려보면 그들 중에서 두뇌가 명석하고 재주가 특출했던 친구들이 기억이 나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친구들 중에는 재치가 너무 차고 넘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타고난 머리 값을 꼭 해야 하고 그러다가 말썽도 일으켰던 친구들이 생각 나실 줄로 믿는다. 아마 Jefferson 은 미국사람들로 부터 숭앙받는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나고 까닭에 말썽도 제일 많았던 분이 아닐까 싶다. 그분은 외국어 5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한다. 1962년도에 사학자 7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Jefferson 대통령을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 5인중의 한사람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래서 Jefferson 에 대해서는 그분의 좋은 점 약한 점을 포함한 인간으로서의 그분, 미국역사의 가닥을 잡아놓은 대통령으로서의 그분 등으로 나누어서 써보고자 한다.
이번호의 글을 읽으신 후에는 독자들마다 개인적인 판단이 스시리라고 생각되지만 조금 성급하게 결론부터 얘기해 보자면 필자는 Jefferson 의 인간적인 사적 일생은 Shakespeare 가 썼음 직하게 비극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더러 역사가들 중에는 Jefferson 이 workaholic 처럼 사망할 때까지 쉬지 않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해온 이유가 인간적인 비극과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필자가 읽은 Jefferson 에 관한 글들의 상당한 분량이 그분의 “인종관과 노예제도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써진 것들인데 분명하고 시원한 글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 또 한 번 더 방정을 떨면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필자는 “현대적 기준”으로 재어보면 Jefferson 은 “racist” 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어느 특정인종은 근본부터 열등하다는 Adolf Hitler 식의 eugenistic 적인 racist 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분의 노예제도에 관한 생각에도 역사가들 간에 혼동이 많은 것 같다. 필자는 Jefferson 의 노예제도에 관한 말, 글, 행동에 일관성이 없었던 것 같다고 느껴져서 여러 역사가들의 혼동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분이 골수적인 “남부양반” 출신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에 그분이 결코 친 노예제도 주의자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미국 원주민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그들을 특정지역으로 강제이주 시킬 것을 구상해 보았다고도 하며 흑인노예문제의 해결방안으로는 흑인들만의 주나 독립 국가를 건국하도록 해보자는 생각도 했다고는 하지만 그분은 이미 20대 후반 이었던 버지니아 주의원 시절 노예제도 금지 법안을 상정하는 등 꾸준히 남부 출신답지 않게 노예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었다.
Jefferson 은 버지니아 주에서 대농장주 (5천 acres 를 Jefferson 에게 유산으로 남겨준)의 열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여위었고 버지니아 주의 College of William and Mary 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었다. 딱한 사람들을 보면 더러 무료변호도 해주었다고 한다. 치부하는데 급급했던 악덕 변호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한번은 할머니가 백인이었고 할아버지는 흑인이었던 사람을 노예로 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무료변호를 해 주었는데 재판에 패소하자 그 흑인에게 돈을 주었다고 한다. 어떤 역사가는 그 흑인이 비노예 주로 도망하라고 Jefferson 이 돈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분의 흑인들에 관한 생각은 분명치 않은 것 같은데 “과거의 흑백간의 경험이 너무 좋지 않아 평화롭게 공존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All men are created equal” 이라는 명문을 미국의 독립선언서에 써넣은 Jefferson 이 “men” 에 흑인을 포함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더러 있으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립선언서의 원고에 Jefferson 은 “노예제도”는 도덕적 죄악으로서 미국에서 금지되어야 한다는 문구를 넣었는데 그 문구에 반대한 남부의원들 때문에 삼일간이나 대륙의회에서 격론 끝에 노예문제가 삭제된 채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Jefferson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이삼십 명의 노예들을 유산으로 받았고 그의 장인이 사망하면서 만천 acres 의 땅과 큰 빚과 함께 백오십여명의 노예들을 인수받았다 고 하는데 그분이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그분의 일생동안 6백여 명의 흑인들이 노예로 그분의 손을 거쳐 나갔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의 현대적 감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노예들의 “인권”에 대한 당시 미국 남부사람들의 견해이다. 많은 남부사람들 에게는 노예란 인권 같은 것은 없는 하나의 “재산”에 불과하였다.
“재산”이란 관점으로 보면 농장에서 꼭 필요한 소나 말에서 크게 다를 게 없는 것이고 노예에 관한 “외부인”들의 간섭”은 남부사람들의 재산권을 시비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노예문제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남북 전쟁 중 남부사람들의 구호들에는 “Liberty!” “State Sovereignty!” 등의 초점이 맞지 않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Jefferson 은 측량기사, 과학자, 발명가, 건축설계가, 사상가, 철학자 (미국 철학회 회장), “철학적인 종교인 (만일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치자면), 대농장주, 농식물연구가, 교육가, 정치가등 받은 호칭도 많으며 전문지식의 수준이 지금보다는 얕을 때이기는 했지만 그 호칭들마다 그 앞에 “대”자를 붙여주어야 할 만큼 아주 multi-dimensional 한 분으로써 간단하게 평가를 내리면 틀린 말이 되기가 더 쉬운 분이다. 그분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해서 버지니아 주에 종교의 자유법이 제정되도록 했으며 기독교에 대한 신앙관도 너무 포용적이어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분을 “Godless” 기독교인이라고 비난했었다고 한다.
버지니아 주에 있는 Monticello 라고 불리는 Jefferson의 저택을 관광하면서 그분을 “발명가”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식당에 아래층 주방에서 조리한 음식을 올려 보내는 dumb waiter 가 있었으며 “친불적 인사” 이었다는 명성답게 온통 불란서식 가구로 가득 찬 Living Room 의 모서리에 사람 키보다 조금 더 높은 괘종시계가 서있는데 태엽역할을 하는 큰 추의 쇠줄이 마루에 뚫린 구멍을 통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있었다. 그때 당시의 시계들이 추에 달린 쇠줄이 짧아 일주일에 한번 정도로 추를 올려주었어야 했는데 Jefferson 의 괘종시계는 줄의 길이가 길어서 한 달에 한번만 추를 끌어 올려주면 되었었다고 한다. “발명가” 인지 “장난꾸러기” 인지는 독자들께서 판단해 보시기 바란다.
그분은 독학으로 건축설계를 공부했다는데 그분이 대통령 퇴임 후에 설립한 명문 University of Virginia 의 원건물들을 전부 설계하였다고 한다. University of Virginia 는 “종교의 지배를 받지 않는 대학교,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갈수 있는 대학교” 를 만들기 위해 설립하였으며 그분이 초대 총장을 지냈다고 한다.
Montice
llo 를 보면서 또 하나 신기하다고 느꼈던 것이 있다. 고대 로마의 건물들을 본 후 Jefferson이 직접 설계해서 지었고 사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 했었다는 그 집이 정문으로 들어갈 때에는 자그마한 아름다운 정원을 통해서 들어가는 이층집이었는데 후면으로 나와 보았더니 삼층집이었다. 지형을 잘 이용해서 아마 일이층은 Jefferson 의 가족들이 “Upstairs” 의lords 로서 살았고 “지하실” 에서는 하인 등 “Downstairs” house staff 들이 살았다고 한다.
집구조가 자연스럽게 양반과 쌍놈을 갈라놓았는데 후원에는 그때 당시의 농촌 집처럼 조그만 채소밭도 있어서 옛날 우리나라 농촌 집을 방문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역시 보기에도 좋고 하인들 거소답지 않게 자연스럽고 아늑한 기분을 주었다. 부엌은 집과는 별채로 큼지막하게 지어놓아서 음식조리를 하는 냄새가 본채에 올라오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 같다.
Jefferson 은 음악에도 재주가 있었던지 violin 을 연주하면서 Piano 를 잘 치던 스물세 살의 젊은 과부 Martha Wales 를 만나서 그분의 나이 29세 때 Martha 와 결혼하였다. 결혼식 피로연을 삼일간이나 했었으나 그 다음해에 큰 빚을 지고 있던 장인이 사망하자 장인의 유산을 받아 그 빚정리로 수년간 힘들었었다고 한다. Jefferson 은 원래 재산관리에는 소질이 없었던 듯하다. 그분의 말년에는 장서 6,500 권을 국회도서관에 팔았어야 했다고 하며 1826년 그분이 사망했을 때에는 자녀들에게 남겨줄 유산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에는 부채의 정리를 위해 재산이 공매되었었다고 한다.
Martha 는 성격이 명랑하고 친절하고 후덕하여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이때의 결혼생활이 Jefferson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Martha 는 결혼생활 10년 중 여섯 남매를 낳았으나 네 명은 어려서 죽고 딸 둘만 생존하였다. Martha 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데 다산으로 몸이 허약해져서 마지막 딸을 낳은 후 몇 달 만에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Martha 는 성장하면서 두 계모의 푸대접을 받았었던지 자기가 사망한 후 남는 자녀들이 계모 밑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Jefferson 에게 재혼하지 않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아내의 사망은 Jefferson 에게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을 주었던 듯하다. 그분은 부인의 사망 후 삼주동안 방안에서 나오지 않으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서 방안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한다. 그 후 몇 달간 혼자서 말을 타고 매일 숲속을 헤매고 다녔다고도 한다. 그분은 재혼하지 않았다. 그분은 이때부터 슬픔과 공허감을 메우기 위해 공직활동에 더 전념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처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게 받아드렸던 것으로 보이는 Jefferson 에게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 “scandal” 이 있다. 글을 쓴 사람들에 따라 얘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 윤각은 대강 아래와 같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남자의 마음”
Jefferson 을 평가하려할 때 가장 혼돈스러운 그분의 일면에 “노예” (하인) Shelley Hemmings 와의 관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Master-Slave 의 관계가 아니고 신분을 초월한 연인관계 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Hemmings 는 Jefferson 의 부인이 시집올 때에 데리고 온 어린 노예이었는데 Jefferson 의 딸이 출생하자 딸의 몸종으로 일했었다고 한다. 열여섯 살 난 Hemmings 와의 관계는 부인 사망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Hemmings 와는 1남3녀를 낳으며(모두 Jefferson 의 자식들 이었을 것으로 추정) 36년 동안이나 관계를 계속해왔다. 연모의 정을 느꼈던 것은 Jefferson 만이 아니었다고 보인다고 한다.
Jefferson은 대농장주, 주의원, 대륙의회의원, 주지사, 주불란서 미국공사, 초대 국무장관, 부통령, 대통령, 대학교 총장 등 최고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세상의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Hemmings 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왔던 것이다. 선거 때마다 이 scandal 이 큰 문제가 되었었다고 한다. 미국 판 Romeo 와 Juliet 가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Hemmings 의 처신이다. 미국에 살 때에는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도망을 칠 수 없었다 치더라도 Jefferson 이 주불 미국공사로 있었을 때에 비노예 국가이던 불란서에서는 싫었으면 얼마든지 도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Hemmings 는 충직한 노예답게 가 아니라 충실한 애인답게 Jefferson 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Jefferson 이 왜 끝까지 Hemmings 를 노예에서 해방시키지 않았는지, 출생한 자녀들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는지도 시원하게 설명한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인간 Jefferson Story 를 “happy ending” 으로 끝내고자 한다. Jefferson 사망 후 100여년 만에 Jefferson 가의 후손들과 Hemmings 가의 후손들이 서로 만나서 혈통을 인정하고 화해했다고 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