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홀더 법무장관만큼 공화당의 미움을 산 오바마 행정부 각료도 없을 것이다. ‘공화당의 펀칭백’이라고 불릴 정도로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고 수차례 해임 촉구에 시달렸다. 2012년 공화당 주도 하원은 홀더의 의회모독 혐의 기소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현직 장관으로선 처음이었다.
그런 홀더가 지난주 ‘드디어’ 사임을 발표하자 공화당의 반응은 환영 일색이었다. 최소한의 표정관리도 없이 “속이 시원하다”는 탄성에서 “온갖 스캔들을 줄줄이 남기고 떠나는 가장 분열적인 최악의 법무장관”으로 폄하하는 인신공격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지난 6년 가까이 공화당 하원과의 적의에 찬 반목에도 꿋꿋이 버티었던 홀더의 사임 결정은 그 타이밍이 절묘하다고 폴리티코는 분석했다. 개인적인 우정과 진보적 이념, 그리고 흑인의 역사를 공유한 특별한 관계의 세 사람 - 오바마 대통령과 발레리 자렛 백악관 선임고문 그리고 홀더가 지난 몇 달간 심사숙고한 끝에 합의한 이상적 시기였다는 것이다.
공화당 뿐 아니라 백악관 참모들까지 홀더에게 물러나라고 압박했던 수차례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홀더의 이번사임 발표의 이유로 폴리티코가 꼽은 것은 두 가지 측면이다.
첫째는 “지금이 아니면 끝까지 못 한다”는 정치적 타이밍이다.
벌써 1년 가까이 홀더는 사임을 원했지만 대통령은 ‘가장 가깝고 편한 극소수의 내 사람’ 중 한명인 그의 떠남을 만류해 왔다고 워싱턴 인사이더들은 전한다. 그러나 중간선거를 통한 공화당의 상원장악 가능성이 높아진 정치 환경이 더 이상의 지체를 용납할 수 없게된 것이다.
지금 발표해야 대통령이 후임을 선정하고 검증을 거쳐 중간선거 후 아직 민주당이 주도하는 레임덕 회기에 어렵지 않게 상원 인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해 관련법 개정으로 각료의 인준안은 단순과반수로 통과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공화당 주도 새 상원에서의 오바마가 지명한 법무장관 인준? 상상만으로도 힘겹게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홀더의 개인적 측면, 명예로운 퇴장을 위해서다. 취임초기부터 잇단 악재에 휘말리며 불명예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홀더에겐 지금이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가장 좋은 입장이다. 특히 백인경찰의 흑인청소년 총격살해 사건으로 인종시위가 격화된 미주리주 퍼거슨을 방문해 주민들과의 진심어린 대화를 통해 사태를 진정시켰던 것은 법무장관으로서 홀더의 ‘가장 훌륭했던 때“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미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지명한 미 최초의 흑인 법무장관 에릭 홀더의 유산에 대해선 명암이 엇갈린다. 뉴욕타임스는 “가진 것 없고 잊혀진 시민들을 위한 정의구현에 앞장 서왔다”고 평가한 반면 월스트릿 저널은 “홀더의 시대는 정치가법을 압도한 시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찬사와 비난, 양쪽 모두 상당한 일리가 있다. 공(功)과 과(過)가 뚜렷하기 때문이다.민주당도 비판하는 그의 실책은 적지 않다.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월스트릿의 거대 기업들과 그 책임자들에 대해 단 한건의 기소도 하지 않았다. “너무 대규모 회사들이라서 형사 기소할 경우 국가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줄것이기 때문”이라는 홀더의 상원 법사위증언은 대마불사(too big to fail)를 비틀어 “감옥을 가기엔 너무 거대해(too big to jail)”라는 야유를 빚어내기도 했다.
국가안보국의 수백만 시민에 대한 통화기록 수집을 두둔하고 기자의 통화내역압수 등 언론사찰 의혹을 받았는가 하면 실패한 총기밀매 함정수사 ‘분노의 질주’작전에 관한 의회조사에 필요한 자료제출 요구에 협조하지 않아 의회모독 혐의의 대상으로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될 홀더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민권 수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깊은 사명감을 감추지 않았고 확실한 공헌도 남겼다. 2009년 초 법무장관 인준청문회에서도 부시집권 8년 동안 축소되고 훼손된 인권국의 재건 강화를 우선과제로 꼽았었다.
신중한 오바마와 달리 그는 인종문제언급에 주저함이 없었다. 오바마 취임한 달도 채 안된 2009년 2월 ‘흑인역사의 달’ 기념식 연설에서 “미국은 인종의 멜팅팟으로 자부하고 있지만 인종문제에 있어 우리는 겁쟁이들의 나라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지적,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벌집을 쑤신 듯한 반응에 백악관 참모들은 그의 ‘정치성 부족’에 아연실색하며 미디어 훈련을 강요하는 등 후유증이 따르긴 했지만 홀더를 “오바마의 사람, 오바마의 양심, 인종에 대한 오바마 내면의 소리”로 자리매김한 스피치였다고 워싱턴포스트는 보도했다.
그는 약속대로 인권국을 강화했고, 소수계의 투표참여에 장애가 되는 보수지역 주들의 투표권 제한법을 겨냥한 법정투쟁을 적극 주도했으며, 유색인종에게 불공정한 형사사법제도의 개편에 착수했고, 백인 다수의 지역 경찰과 소수계 커뮤니티 간 신뢰회복에 앞장 서왔으며 동성애자의 법적동등권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차기 법무장관 지명을 둘러싼 물밑투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또 다른 홀더’는 절대 안 된다고 벼르는 공화당과 ‘또 다른 홀더’가 꼭 필요하다고 압박하는 민권진영의 힘겨루기다. 누가 되든 최소한 민권 수호에 겁내지 않았던 홀더의 ‘용기’만은 계승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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