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도 90도를 넘나든 무더위를 겪은 후의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계절의 변화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청결한 바람과 투명해진 공기, 그리고 깊어진 하늘…영 올 것 같지 않았던 가을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서고 있다. 어김없이 바뀌는 계절 속에서 삶의 피로를 씻어주는 자연의 ‘영원성’도,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보장된 사안은 아니다.
경제에서 테러까지 잇달아 발생하는 온갖 위기에 밀려 관심권에서 내처졌던 기후변화가 이번 주 유엔총회를 통해 ‘잠깐’ 국제적 뉴스로 떠올랐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주최로 23일 하루 종일 계속된 이번 기후정상회의는 세계 정상들이 가장 많이 참석한 기후회의로 기록되었다. 그에 이틀 앞서 30만 인파가 맨해튼을 메운 뉴욕의 거리행진은 사상 최대 규모의 기후관련 정치적 시위로 꼽힌다.
그러나 193개국 정상들의 모임도, 전 세계 2,500여 곳에서 같은 날 동조한 60만명의 거리행진도, 답보상태인 기후변화 대응에 획기적 진전으로 이어지기는 힘들 것이라고 관계 전문가들은 아쉬워한다.
영국과 이태리, 발틱3국과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정상들은 제각기의 노력을 과시하고 입장을 설명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도 “기후변화 대응을 부담이 아닌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는 발상의 전환”을 제안했고 프랑스와 독일은 개발도상국의 대응을 돕기 위한 10억 달러씩의 기금 지원도 약속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유산으로 남기기 원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스피치도 강력했다. 지난 6월 행정명령을 발동, 미 전국 화석연료 발전소의 온실개스 배출량을 대폭 감축시키는 규제 발표로 당당해진 ‘리더’의 입장에서 그는 각국의 공동대응만이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탄소배출량을 2020년까지 2005년 대비 17%까지 줄이겠다고 약속한 오바마는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상관없이 모든 나라가 동참해야만 기후변화 투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서 “어느 나라도 무임승차는 할 수 없다”고 못 박았고 지구를 병들게 한 인간의 책임을 일깨우며 “우리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느낀 첫 세대이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최대 배출국 1위 중국을 비롯, 3·4위인 인도와 러시아의 정상들이 불참해 김이 좀 빠져버린 이번 회의는 애초부터 구체적 정책 합의를 기대한 모임은 아니었다. 내년 파리에서 열릴 기후변화 총회를 위해 터를 닦는 자리였다.
지난 10여년 기후변화 회의는 계속 열려 왔지만 진전 위한 합의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답답한 유보상태를 보이고 있다. 1997년 채택된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가 2012년 말로 만료되자 2020년까지 연장하는 것에만 간신히 합의한 정도다. 2015년 12월로 예정된 파리총회에선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기후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이에 앞서 각국은 내년 4월1일까지 구체적 플랜을 제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회의는 말하자면 각국 정상들의 기후대응 의지를 격려하고 결집시키는, LA타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치어리딩 세션’이라 할 수 있다.
홍수와 태풍, 산불과 가뭄 등 어느 나라도 피해갈 수 없는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지구를 살리자는 하나의 명제를 위해 모였지만 각국의 힘겨루기 탐색전은 여전히 팽팽했다. 기후협약은 막대한 돈이 관계되는 경제협약이며,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라는 것은 수조달러의 엄청난 자산을 땅 속에 묻어두고 포기하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또 부자나라는 경제적 타격을 흡수하면서 청정에너지로의 대체가 가능하지만 절박한 빈곤층인 많은 개발도상국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교토의정서처럼 구속력을 가진 국제기후협약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협약 체결을 위해선 먼저 각국 정상의 정치적의지가 확고해야 한다. 그래야 기후변화가, 참수를 자행하는 잔인한 테러집단 못지않게 ‘중대한 위협’이라고 국민 설득에 나설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가장 힘든 정상은 오바마 대통령일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미국민의 관심은 테러와 미국의 공습으로 떨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보다 낮은 편이기 때문이다. 설사 ‘기적적으로’ 2015년 파리에서 신 기후협약이 체결된다 해도 미국의 상원비준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보다 양극화가 훨씬 덜했던 10여년전에도 교토의정서의 비준을 거부한 것이 미국의 연방의회다.
그래서일까. 미디어의 관심도 시들하다. 수십만이 쏟아져 나온 거리행진도, 유엔 기후정상회의도 ‘오바마의 새 중동전쟁’에 가려진 채 보도에서 밀려버렸고, 새로운 정책은 나오지 않은 채 지구는 점점 뜨거워져간다며 “시간이 촉박하다”고 외치는 과학자들의 경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 기후변화 행진이 지나가는 뉴욕의 거리에 3,000 파운드짜리 얼음조각이 세워졌다. ‘미래’를 뜻하는 THE FUTURE라는 이 글자 조각은 거리에 가득 찬 사람과 태양의 열기에 얼음 녹은 물을 뚝뚝 흘리며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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