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지난 열흘 간 미국을 가장 뜨겁게 달군 뉴스 가운데 하나는 NFL 볼티모어 레이븐스의 스타 러닝백 레이 라이스의 배우자 폭행과 그의 징계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라이스는 지난 2월 애틀랜틱시티의 한 카지노호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재의 부인이자 당시 약혼녀였던 재나이 파머의 안면을 주먹으로 가격해 혼절시켰다. 라이스는 폭행혐의로 기소됐으며 NFL에 의해 2게임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주 초 ‘TMZ 스포츠’에 의해 폭행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긴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사태가 커졌다. 레이븐스는 즉각 라이스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그를 방출시켰으며 NFL도 무기한 출장정지를 결정했다. 그런 가운데 NFL 사무국이 적절한 조사와 징계를 등한시했다는 의혹이 커지면서 로저 구델 커미셔너에 대한 해임 압력까지 높아지고 있다.
한 선수의 배우자 폭행으로 연봉 4,200만달러를 받는 파워포지션인 커미셔너의 자리까지 흔들릴 정도로 미국사회는 가정폭력에 엄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이 여전히 뿌리 깊은 미국사회의 질병이라는 사실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미국 여성들 가운데 3분의 1이 평생 한 번 이상 가정폭력이나 스토킹에 시달린다는 통계는 이것을 뒷받침해 준다.
라이스 케이스가 터지면서 덩달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배우자 파머이다. 두 사람은 폭행사건이 일어난 다음 달 정식 결혼했다. 그리고 사태가 확산되자 파머는 자신에게 폭행을 유발한 책임이 있었다며 남편을 두둔했다. 파머의 태도에 제 3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그러나 가정폭력 전문가들은 피해자의 가해자 감싸기가 아주 흔하다고 지적한다.
배우자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해서 곧바로 갈라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피해를 당하고 보통 6~7번 정도 상담자를 찾아온 후에야 결별을 마음먹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피해자의 취약한 경제적 지위나 법적 신분 때문일 수도 있고 문화적인 배경이 작용하기도 한다.
또 결별이 더 큰 폭력을 부를 수 있다는 두려움에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가정폭력으로 목숨을 잃는 케이스의 70%는 결별 후 발생한다. 가해자와 헤어진 피해자는 더욱 폭력적인 위협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
배우자에게 학대와 폭행을 당하는 피해자들을 보며 주위사람들은 쉽게 판단하고 결별을 종용하지만 일생을 걸었던 관계를 일시에 청산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폭력적인 관계라 할지라도 탈출이 쉽지 않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리도 잘 의식하지 못하는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때린 남편이 “잘못했다. 사랑한다. 예전처럼 잘 살아보자”고 고백하고 사과하면 매 맞은 아내는 한때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가 밝혀낸 조건형성의 원리가 배우자 관계에까지 어김없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비극적 조건형성은 13년간이나 남편의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다 탈출한 폴리트 켈리가 쓴 시 ‘오늘, 저는 꽃을 받았어요’(Today, I received flowers)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시는 폭력을 휘두른 후면 어김없이 사과와 함께 꽃을 보내는 남편과 아내의 두려움을 반복적으로 묘사한 후 이렇게 마무리된다.
“오늘, 저는 남편에게서 꽃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이에요. 오늘 제 장례식이 있었어요. 어젯밤 결국 그가 저를 때려 죽였어요. 제가 용기를 내서 좀 더 일찍 그를 떠났다면 오늘 꽃을 받을 수는 없었을 거예요.”
이처럼 피해자들은 가해자 곁에 계속 남아 있든, 아니면 떠나든 폭력의 끔찍한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다. 이것이 수많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처해 있는 딜레마이다. 가정폭력의 끔찍한 굴레를 떨치는 일은 칼로 무를 자르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피해자들을 향해 비난과 손가락질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가정폭력 근절을 위한 노력은 피해자들의 심리적 고통과 사회경제적 처지를 헤아리고 이해해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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