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1,600억원대의 횡령과 배임 등 혐의로 1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재벌회장이 휠체어에 앉은 채 결심공판에 나온 모습이 충격적이다. 환자복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막대기처럼 가늘고 앙상하다. 살짝 내려치기만 해도 곧바로 부러질 것 같다.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후 현재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재벌회장은 “살고 싶다”며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했다. 죗값은 치러야 하겠지만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던 부자에서 당장 목숨 부지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 그의 추락에 조금은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보통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액수의 재산을 갖고 있는 재벌회장이 무슨 이유로 회사 돈까지 빼돌린 것일까. 서민들을 짓누르는 생계 불안 같은 것은 있을 리 없을 테니 먹고 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사촌 동생들과의 경쟁의식이 탈법과 위법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횡령한 액수와 전체 재산을 비교해 보면 이런 행위는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는다.
조 단위의 재산을 가졌음에도 계열사 돈을 빼돌려 선물투자를 하다 올해 징역형이 확정된 또 다른 재벌회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들은 미국에서도 많다. 몇천만달러 더 벌겠다며 월스트릿에서 불법적인 내부거래를 하다 인생을 망친 억만장자도 있다.
평생 물 쓰듯 써도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가지고도 욕심을 부리다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과거처럼 현물이 아닌, 전자거래 등을 통해 공간상에서 순식간에 이동하는 추상적인 재산이 되면서 부자들이 자신의 재산 규모를 실감하기가 어려워진 게 한 가지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태가 큰 부자들뿐 아니라 작은 부자들, 심지어 보통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좀 더 보편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지난 해 6월 미국의 저명 학회지에 발표된 한 연구논문은 이런 설명을 위한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연구의 결론은 “우리 인간에게는 자신이 소비할 수 있는 이상으로 쌓아 두려는 뿌리 깊은 본성이 있다. 심지어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연구팀은 헤드셋을 쓴 피실험자들을 컴퓨터 앞에 앉히고 5분 동안 소리를 들려줬다. 이들은 듣기 좋은 음악과 귀에 거슬리는 백색소음을 자기 마음대로 고를 수 있었다. 이름다운 음악에는 아무런 대가가 없었지만 소음을 고르면 횟수에 따라 맛있는 도브 초콜릿이 주어졌다.
실험 전 이들에게 초콜릿을 몇 개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가라고 물었더니 평균 3.75개였다. 그러나 실제로 초콜릿을 벌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소음의 고통을 견뎌가며 개수를 늘려갔다. 그리고는 평균 10.74개의 초콜릿을 얻었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먹은 것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당초 자신들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한 것과 비슷했다.
연구팀은 “사람들은 일단 행동에 돌입하자 멈출 줄을 몰랐다”며 이런 행동을 ‘무분별한 축적’(mindless accumulation)이라고 불렀다. 무분별한 축적은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더 가지기 위해 불법까지 서슴지 않는 재벌들의 행태를 잘 설명해 준다. 그리고 액수와 규모만 다를 뿐 우리들 역시 비슷하다.
한인사회에도 ‘무분별한 축적’이 의심되는 부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큰돈을 벌었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베푸는 데 지나치게 인색하다. 그렇다고 지금 인색한 까닭이 사후 사회 환원을 위한 것 같지도 않다. 그저 많이 벌고 지독하게 아끼기만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지난해 이 연구를 리뷰한 하버드 비즈니스대학원 마이클 노튼 교수는 “무분별한 축적이라는 무의식적 동기가 우리의 시야를 단기적으로 만들고 심지어 불행한 선택으로 이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들은 돈이나 초콜릿처럼 셀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대부분 세기가 힘든 것들이다.” 셀 수 있는 것들을 무수히 갖고 있음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다가 두 평 남짓한 공간에 갇히게 된 재벌총수들만큼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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