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아일랜드 가 미국헌법에 마지막으로 동의한 1790년도의 미국 인구조사에 나타난 당시의 미국의 형편을 들여다보자. 미국영토 865,000 제곱 마일에 거의 4백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다. 이 영토는 1900년대 후반에 가지게 될 미국영토의 4분의 1에 불과한 것이었다. 미국인 대부분은 농부들 이었고 뉴잉글랜드 남부 지역과 중부주들이 농토로 개발되었었다. 기타의 지역들에서는 원시림이 자라고 있었는데 개척민들은 힘들게 나무를 벌목하지 않고 뿌리 쪽의 나무껍질을 베꼈다가 그 나무들이 수년 후 고사하면 그때 나무를 제거하였다. 나무를 제거하기 전에는 나무들 사이에 농사를 지었고 나무가 제거된 후에는 큰 농토로 개간하였다.
던 까닭에 1789년에 인구가 8천명이 넘은 도시는 미국에 여섯 개 밖에 없었다. 제일 크고 아름다웠던 도시인 필라델피아에는 42,000명이 살았고 뉴욕은 둘째로 33,000 명이 살았는데 더럽고 냄새가 나는 도시이었으나 분주하고 급성장하는 상업도시 이었다. 그 외의 도시로는 Boston, Charleston, Baltimore, Salem 등이 있었다. 필라델피아와 뉴욕만 수도관이 설치되고 있었으며 도로에 분명한 인도가 만들어져 있었다. Philadelphia 는 포장된 도로들이 많이 있었으나 나머지 도시들은 cobble stone 으로 된 길이 있거나 비포장도로였고 청소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더러웠고 병마에도 시달렸다. 도시간의 도로는 제대로 건설되어있지 않아서 도로면이 돌부리 투성이었으며 들판위에 무수한 발자국이 남아 있는 정도이었으며 이런 도로가 메인 주에서 조지아 주까지 계속 되었었다. 그나마 비가 와서 땅이 진흙 판이 되어버리는 날에는 도대체 왕래가 불가능 했었다.
길이 비교적 좋았다는 뉴욕과 필라델피아 간에도 여행 역마차로 이틀이 걸렸는데 요금은 6불이었으나 도중 하루 묵어야 하는 여관비용은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육로로 보다는 배를 이용했어야 했기 때문에 대게 강에서 50 마일 이내의 지역에서 살았다. 육로로는 농산물들을 땅이 얼은 다음 운반하였고 미시시피 강으로 뉴올리언스까지 배로 농산물 등을 운반해서 팔고는 육로로 걸어서 귀가했다. 1787년부터는 수증기 기관선박이 운항되기 시작하였으나 불을 내뿜는 이 괴물선을 처음에는 두려워하며 잘 쓰지 않으려고 하였다 한다.
우편은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1800년 까지는 메인에서 조지아까지 정규 우편이 없었고 혹 배달이 되더라도 3주일이 걸렸다. 이처럼 각 주들은 고립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각 주들은 독립국가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우편물 수송용인 post road 가 있었으며 우편로 중간 중간에 갈아주어야하는 말들을 관리하는 post (역) 이 있었던 까닭에 지금도 우편국을 post office 라고 부른다.
영국에서는 양반이 되려면 출생신분이 좋아야 될 수 있었지만 신생 미국에서는 누구나 땅과 돈만 있으면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양반이 될 가능성이 있었었다. 주로 뉴욕, 보스턴 등지의 상업도시에서 상업인들과 남부의 대농장주들이 영국식 복장을 하고 영국식 음식을 먹고 양반행세를 하고 살았었다. 남부에서는 대농장주 되기가 차츰 어려워 졌으나 미국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이었다.
1970년대 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영국은 세계 각지에 있던 식민지들을 다 잃어버린 지도 오래되고 경기불황도 계속되어서 국력이 아주 약해졌고 영국민들의 자존심도 많이 격하되어 있었었다. 또 여왕의 여동생 마가렛 공주, 아들 찰스 황태자, 딸 앤 공주 등은 연일 경쟁하다시피 어리석은 행동으로 가십거리가 되고 있었다.
필자의 한 친구가 대기업직원으로 런던을 방문하여 택시를 타고 가면서 Elizabeth 여왕에 대해서 불경스러운 농담을 했다고 한다. 택시 기사의 차가운 눈초리와 불친절한 반박의 말을 듣고 아주 당황했었다고 한다. 영국국민들에게는 영국의 왕실이 성역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결과였다.
미국 대통령 중에 조지 워싱텅, 토마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들은 미국사람들이 흔쾌히 ‘성인화 (canonized’ 한 분들이다. 필자는 미국이 억세게 운이 좋은 나라이었다는 얘기를 이미 여러 번 하였는데 위의 세분 대통령들은 미국의 운을 티워준 많은 사람들 중에 탁월한 애국자들이다. 세분이 다 성격상 결함들이 많은 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을 아주 혹평하는 글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일화 중에 그분이 어린 시절부터 정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새 도끼와 찍혀 넘어진 Cherry tree” 이라는 전설은 어느 작가의 상상에 의한 얘기임을 모두 알면서도 미국 사람들은 그 일화를 되풀이해 이야기 한다. 더러는 워싱턴 대통령이 젊어서부터 출세욕에 빠졌던 사람이었던 탓에 연상의 대농장주 과부였던 Martha 와 결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분이 미국의 ‘왕’이 되고자 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도 있다.
그래서 위 세분 대통령들에 대한 논평은 극히 조심스러워 진다. 독립 전쟁 중에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워싱턴 장군은 “월급은 사양하니 지출된 경비만 지불해 달라” 고 대륙의회에 요청했었다고 한다. 제출한 청구서에 “너무 사치스럽고 과다한 비용”들이 적혀있어서 대륙의회는 월급을 정하자고 하였다고 한다. 대농장주로써 많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워싱턴 장군은 부인이 사망하면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라고 유서에 남겼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싱턴 장군은 미국이 필요로 할 때 나타난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다. 우리는 그분을 장군으로써 유명해진 사람으로 잘못 알기가 쉬운데 실은 미국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버지니아 일부의 민병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운 것 이외에는 직업군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 전쟁 중에는 헐벗고 굶주리는 독립군을 이끌고 과감한 전략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었다. 총사령관 시절에는 대륙의회가 최소한의 군수물자를 조달하도록 계속 요청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이었다. 그분은 탁월한 정치 지도자였고 당시 미국 정치의 구심적인 역할을 한 분이었다.
새 미국헌법에 의하면 대통령과 부통령은 각주의회가 선출하는 선거인들의 투표로 선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각주의 상원의원수와 하원의원수를 합한 수와 동일하게 뽑게 되어있던 선거인들의 선출방법은 각주의회가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선거인은 한 표에 두 명의 대통령후보자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최다득점자는 대통령으로 차점자는 부통령으로 선출되도록 되어 있어서 요즘처럼 정부통령이 한 ticket 으로서 출마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이었다.
모든 선거인들이 전부 대통령에는 워싱턴 장군 에게 투표하였으며 차점자인 메사추세츠의 존 애덤스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Washington 장군은 1789년 4월에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취임식은 당시의 수도이었던 뉴욕시의 Wall Street 와 Broad Street 의 교차점에 있는 Federal Hall 에서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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