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윤성 논설위원
▶ yoonscho@koreatimes.com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의 방문이 수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가 보여준 한결같은 겸손함 때문이었다. 교황은 스스로를 ‘하인 중의 하인’이라 칭했다. 주교들과의 모임을 마치고 방문기념 서명을 부탁하자 커다란 방명록 귀퉁이에 100원짜리 동전만큼 작은 글씨로 ‘Francisco’라고 적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낮아짐과 겸손의 의미를 깨우쳐 주었다.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들도 필요할 때면 자신들을 ‘국민들의 하인’이라고 부르며 한껏 낮춘다. 이들이 국민들의 하인인 것은 맞다. 그래서 공적인 심부름꾼이라는 뜻의 ‘공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겸손은 선거철이나 인사청문회 때의 잠깐 시늉일 뿐이다. 선거가 끝나거나 자리에 앉고 나면 하인이 아니라 상전 중의 상전으로 행세한다.
얼마 전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자신의 아들이 연루된 군내 폭행사건과 관련해 트위터에 사과문을 올리면서 ‘사회지도층의 일원으로서’라는 표현을 썼다가 호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인사들의 속내요 의식이다. 표가 아쉬울 때는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척하지만 일단 권력을 쥐면 표변하고 군림하려 든다.
이런 공복들 가운데 가장 큰 하인은 물론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군림하고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다. 국민들의 안전과 복리를 위한 수단과 힘을 위임받아 주어진 소임을 다해야 하는 자리다. 성경에 보면 주인으로부터 재산을 위임받아 이를 관리하는 청지기 비유가 나오는 데 대통령은 바로 이런 청지기일 뿐이다.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런데도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은 제왕적 위치에 올라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전직 대통령이 욕을 먹어가면서까지 한껏 낮춰놓으려 애썼던 대통령이란 직책의 의미가 다시 지엄한 상전의 자리로 돌아갔다. 낮은 자세로 국민들의 소리에 겸손히 귀 기울이기보다는 청와대에 앉아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만 전달하려 든다.
대통령의 지난 18개월을 보면 의전적인 면에는 필요 이상으로 노력과 관심을 쏟으면서도 정작 국민들과의 스킨십은 너무 등한시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외국방문과 정상회담을 위해 패션을 준비하고 외국어를 연습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면서도 아픈 국민들의 손을 잡아 주는 일은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외면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직후 현장을 찾았던 대통령은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이후 유가족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단 한 차례도 만나주지 않고 있다. 최측근은 대통령이 바빠서라고 핑계를 대지만 이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유가족을 만나면 쓸데없는 정쟁에 휘말리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도 나온다.
그러나 대통령은 숙명적으로 정쟁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자리다. 오히려 이것을 회피함으로써 더 큰 정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지 답답하다. 대선 캠페인 당시 했던, 국민들을 섬기겠다던 약속을 잊지 않을 만큼의 짧은 기억력이나마 있다면 이처럼 매몰 찬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패션과 외국어에 들이는 자투리 시간을 아끼고 시장 방문을 줄인다면 아무리 바빠도 유족을 만날 시간쯤은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 뒤로 숨으려는 모습이 비겁해 보인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대한민국의 정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신동엽 시인이 이상적인 나라를 꿈꾸며 1968년 쓴 산문시가 자꾸 떠오른다.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고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쎌 헤밍웨이 장자…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40여년 전 시인이 꿈꿨던 아름다운 나라는 여전히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중요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그것은 국민들이 깨어 있을 때 아름다운 나라가 비로소 가능해 진다는 사실이다. 국민은 결국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대통령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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