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3월30일, 취임한지 두 달을 갓 넘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오찬연설을 마치고 워싱턴 힐튼호텔을 막 나서고 있었다. 그 비 내리던 오후, 기자단 주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정신병력이 있는 대학중퇴생 존 힝클리 주니어였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15번 이상 보며 10대 창녀로 출연했던 여배우 조디 포스터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던 그는 포스터의 관심을 끌기 위해 주인공 택시운전사처럼 대통령 암살을 기도했다.
힝클리의 권총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리무진을 향해 걸어가는 레이건을 겨냥했다. 2초 만에 6발이 발사되었다. 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았고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달려든 비밀경호원과 경찰도 목과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가장 심하게 다친 사람은 머리에 총을 맞은 제임스 브래디 백악관 대변인이었다. 총알이 관통한 오른쪽 뇌의 손상이 너무 심해 의사들도 고개를 흔들었고 3대 TV는 초기보도에서 브래디 대변인이 사망했다고 전했다.
브래디는 죽지 않았다. 사망확률 90%를 극복하고 반복되는 수술과 재활의 긴 시간 동안 고통과 싸우며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날, 브래디는 많은 것을 잃었다. 왼쪽 반신은 마비되고, 말은 어눌해졌으며, 뇌기능이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 채 휠체어에 의지해 여생을 보내야 했다. 일상의 자립능력과 함께 반평생을 바쳐 쌓아온 커리어도 포기해야 했다.
백과사전 방문판매와 빈병수집 등으로 학비를 벌기도 하며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공공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연방의원들의 보좌관, 국방부·예산관리국·주택개발부의 대변인 등을 역임한 후 1980년 레이건 공화당 대선후보의 공보관으로 발탁되었다. 레이건 팀 백악관 입성 후, 낸시 레이건은 달덩이 얼굴에 40세 대머리로 ‘곰’이란 별명을 가진 브래디보다는 TV에서 백악관을 대표할만한 ‘젊고 잘생긴 대변인’을 남편에게 권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음날 브래디는 기자실에서 “난 오늘 그저 또 하나 ‘잘생긴 얼굴’이 아니라 순전히 재능 덕으로 여러분 앞에 섰다”고 언급, 기자들을 폭소케 했고 일주일 후 대변인으로 임명받았다.
18개월에 걸친 재활 후 브래디는 직장으로 돌아왔다. 잠시 머무는 상징적 복귀였다. 1989년 1월 레이건의 집권2기가 끝날 때까지 그는 ‘백악관 대변인’ 타이틀을 유지했으나 한때 ‘위트와 솔직함, 예리한 직관과 친근함으로 까다로운 워싱턴 기자들에게 신뢰와 호감을 얻어낸 인기 있는 대변인’으로는 결코 되돌아오지 못했다.
한 정신병자의 손에 쥐어진 총기는 성실과 재능으로 쌓아온 한 사람의 성공적인 삶을 이처럼 뿌리째 흔들어 곤두박질치게 했다. 그러나 브래디는 그 암담한 좌절과 분노에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아내 새라의 도움으로 새로운 소명을 찾아냈다. 그리고 ‘총탄도 손상시키지 못한’ 특유의 유머감각과 끈기로 헌신하며 총기규제 강화운동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그에게 총격을 가했던 힝클리는 달라스의 한 전당포에서 29달러를 주고 권총을 구입했다. 사건 6개월 전 카터대통령 암살 목적으로 총을 갖고 비행기에 타려다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도 위조신분증 제시로 손쉽게 총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브래디는 제대로 된 신원조회를 의무화하는 총기규제법 추진에 앞장섰다.
쉽지 않았다. 면허가진 총기상으로 부터 총기구입 시에는 신원조회를 위해 5일의 대기기간을 의무화하도록 하는 ‘브래디 권총폭력 예방법’에 대한 총기로비의 반대는 거세고 끈질겼다. 5일 대기가 합법적 구매자들에게 ‘불편’을 준다며 트집 잡았다. 이들을 향한 브래디의 상원법사위 청문회 증언은 압도적이었다 : “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옷을 입을 때도, 그리고 -빌어먹을- 화장실에 갈 때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이게 그들의 ‘편리’를 위해 내가 치르고 있는 대가다”
브래디법은 평생 총기협회 회원이었던 레이건의 공개지지가 큰 힘이 되어 연방의회를 통과했다. 휠체어에 앉은 브래디가 지켜보는 가운데 클린턴 대통령이 서명을 한 것은 1993년 11월 말, 그 끔찍한 날로 부터 12년이 넘게 걸린 긴 여정이었다.
법무부는 지난 20년 동안 브래디법 시행으로 전과자와 정신이상자 등 부적격자에 의한 불법총기구매가 200만 건이상 차단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죽었을지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브래디법 덕분에 오늘 살아 있다는 의미다.
그 정도로 충분치 않다는 것은 브래디도 알고 있었다. 온라인과 총기쇼를 포함해 총기거래의 40%는 아직도 법적으로 신원조회의 대상이 아니다.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참사이후 추진된 신원조회 전면 확대 법안 통과를 위해 브래디부부도 지칠 줄 모르고 뛰었다. 그러나 지난해 연방상원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아내 구타 폭력 남편도, 절도전과자도, 정신병원 입원경력자도 어렵지 않게 총을 살 수 있는 것이 여전히 미국의 현실이다.
제임스 브래디가 4일 73세로 타계했다. 한발자국 옮기는 것도 ‘투쟁’이었던 자신의 고통과 비극을, 모두를 위해 좀 더 안전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으로 승화시킨 헌신과 끈기를 유산으로 남기고 떠난 그를 기억하며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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