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비행기 사고로 잃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70년대 한 해 평균 3,000명에 달하던 항공 사고 사망자는 안전 기술의 향상과 함께 이제는 1,00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세계 인구는 70억 명 선이니까 단순 계산으로는 1/700만 정도 될 것이다.
그러면 아들과 손주를 모두 비행기 사고로 잃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1/700만 곱하기 1/700만이니까 1/49조에 달한다. 1억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훨씬 적다.
그러나 이 있기 힘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지난 3월 인도양 어디인가 추락한 말레이지아 항공 MH370기에 탔다 사망한 호주 출신 로드니 버러우즈의 부모 조지와 아이린은 지난 주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미사일에 맞아 격추된 말레이지아 항공 MH17기에 탔다 역시 사망한 마리 리스크의 조부모이기도 하다. 부모와 자식이 불과 넉 달 간격으로 각각 추락해 사망한 것은 항공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하긴 고도 3만 피트로 날고 있는 민간 항공기를 미사일로 격추시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에베레스트 산보다 높은 3만 피트 상공을 나는 비행기는 안전한 것으로 간주돼왔다. 말레이 항공도 그렇게 믿고 그 노선으로 비행기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러시아는 보통 나라들과는 좀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은 이미 경험해 봐서 안다. 구소련 시대에도 소련은 딴 것은 다 뒤져도 미사일 기술만은 세계 제일이었다. 인공위성을 제일 먼저 쏴 올린 것도, 유인 로켓을 성공적으로 처음 발사한 것도 소련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미사일 시스템과 함께 인명 경시 전통도 가지고 있다. 1978년 4월 20일 대한항공기가 실수로 소련 영공을 침범하자 소련은 전투기를 보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 비행기는 날개 일부가 날아갔음에도 기적적으로 무르만스크 인근 얼어붙은 호수에 불시착해 2명을 제외하고는 100여 명에 달하는 승객이 목숨을 건졌다.
소련은 하마터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뻔 한 일을 벌여 놓고도 영공을 무단 침입했다는 이유로 기장의 사과를 받아내고 10만 달러에 달하는 구조비용을 청구한 후에야 승객들을 풀어줬다. 소련 공군 지도부는 대한항공기가 오랫동안 소련 영공을 비행하고 있던 사실을 몰랐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은 5년 뒤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1983년 9월1일 대한항공기가 다시 사할린 인근 소련 영공을 침범하자 이번에는 미사일 2대를 발사해 승객 등 269명 전원을 몰살시켰다. 소련은 그 후 이에 관한 어떠한 배상이나 사과를 한 적도 없다.
이번 말레이 항공기에 누가 미사일을 쐈는지에 관해 여러 설이 있지만 과거 행태와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친러 반군이 러시아가 제공한 부크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시킨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들은 말레이 항공기를 군용기로 오인해 미사일을 발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번 사태에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할 것은 물론 반군들이지만 이들을 훈련시키고 무기까지 대준 러시아의 푸틴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푸틴은 총 한 방 안 쏘고 크림 반도를 삼킨 후 동부 우크라이나까지 먹기 위해 이곳 정정 불안을 부채질 하고 반군을 지원하는 등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제 사회는 강 건너 불 보듯 수수방관해 왔다. 이번 말레이기 격추로 우크라이나 사태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이 입증된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중요한 것은 비행기 한 대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구 소련권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냐를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푸틴이 원하는 대로 동부 우크라이나가 떨어져 나가 러시아의 위성국이 될 경우 푸틴의 독재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며 구 소련권 국가들은 다시 러시아의 속국이 될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보전하고 계속 친서방 민주 정부를 유지해 나간다면 푸틴은 힘을 잃고 러시아 민주주의는 부활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푸틴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이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과연 이번에는 동네 깡패 러시아와 맞설 의지를 보여줄 것인가. 말레이 항공 승객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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